[여적] 교장 훈화
중장년들의 중·고교 시절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이는 정례 전체조회가 열렸다. 마무리는 교장의 몫이다. “마지막으로”라며 끝내는 듯하다가 장광설을 이어가기 일쑤였다. 훈화는 학생들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교훈이 담긴 말인데, 좋은 이야기도 길어지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땡볕에 서서 부동자세로 교장의 가르침을 듣는 것은 대체로 고역으로 기억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21일 기획재정부를 시작으로 지난 30일까지 21개 부처와 유관 및 소속 17개 기관의 업무보고를 받았다. 올해 업무보고는 민간 전문가들도 참여하는 대국민 보고·토론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하이라이트는 윤 대통령의 마무리 발언이었다. 11차례 업무보고에서 평균 18분가량 마무리 발언을 했다. 최단 10분(농림축산식품부·해양수산부), 최장 34분(통일부·행정안전부·국가보훈처·인사혁신처) 걸렸다. 윤 대통령은 마무리 발언을 원고 없이 진행했다. 부처의 현안을 거론하다보니 ‘깨알 지시’도 있었고, 만기친람으로 비치기도 했다.
여권 관계자가 윤 대통령의 마무리 발언을 두고 “때때로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처럼 느껴진다”고 촌평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이 학습 능력이 워낙 뛰어나 취임 8개월차에 접어들자 각 부처 업무를 꿰뚫고 있어 마무리 발언 공개도 자신 있게 지시했다”는 대통령실 설명이 무색하다.
윤 대통령은 정치 경험이 짧은데도 직설적 화법을 구사하고, 즉흥 발언도 종종 한다. 게다가 다변이다. 말실수에 의한 사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적은 이란” 발언은 여진이 계속되고 있고, 통일부 업무보고에선 “남쪽의 체제와 시스템 중심으로 통일이 되는 게 상식”이라고 말했다가 ‘흡수통일’ 논란을 자초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을 중단하며 기자들과의 일상적인 직접 접촉을 끊었다. 이재명 부대변인이 최근 윤 대통령의 해외 순방 일정 유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대국민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할 대통령실 대변인단은 사실상 공백 상태다.
대통령이 하고 싶은 얘기를 계속 일방적으로 전달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옳다 해도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처럼 들릴 수 있다.
안홍욱 논설위원 ah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입꾹닫’ 산업부, 액트지오-석유공사 공문 제출요구에 “안보·영업기밀” 부실 답변만
- 4만명 몰린 대학축제서 술 먹고 춤춘 전북경찰청장 ‘구설’
- “남편 관리 잘해” 황재균 벤치클리어링, 티아라 지연에 불똥
- 1630마리 중 990마리 돌아오지 않았다...30대 직장인이 밝힌 진실
- 이번엔 라이브로 모습 보인 김건희 여사···단계적 확대?
- [에디터의창]출생률 제고를 위한 성욕과 교미의 정치경제학
- 유명 가수 집 직접 찾아간 경찰관…알고 보니 개인정보 무단 조회
- 개혁신당이 ‘김정숙 특검법’ 내는 국힘에 “쌩쑈”라고 비판하는 이유는?
- 성일종 “윤 대통령 지지율? 인기 없는 엄격한 아버지 모습이라 그래”
- [단독] 세계유산 병산서원 인근서 버젓이 자라는 대마…‘최대 산지’ 안동서 무슨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