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경제민주화 선도한 ‘개혁가 조봉암’ 알리려 해요”

강성만 2023. 1. 3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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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조봉암기념사업회 이모세·이성란·유수현씨
이모세 회장은 이번에 나온 평전을 알리는 북콘서트를 3월께 열 계획이라고 했다. “죽산이 선도적으로 주창한 평화통일과 경제민주화 논의를 우리 사회에 담론화하고 싶어요. 올해 조봉암 선생의 삶을 다룬 영상물도 제작하려고 합니다.” 왼쪽부터 유수현·이성란씨 부부, 이모세 회장. 강성만 선임기자

“죽산 조봉암(1899~1959) 선생님이 진보당 동지들과 함께 우리 집에서 회식을 종종 하셨어요. 선생님이 함경도 분인 제 할머니가 만든 가자미식해를 참 좋아했거든요. 회식 때 선생님이 저에게 노래를 시키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기도 했죠. 그럴 때면 잘했다며 용돈도 주셨어요. 선생님이 대단한 애연가여서 우리 집 앞이었던 선생님 자택 2층 서재에 언제나 담배 연기가 자욱했던 기억도 납니다.”

최근 인천시 지원을 받아 <죽산 조봉암 평전-자유인의 길>(이택선 지음, 비매품)과 지난해 10월 별세한 죽산의 장녀 조호정 선생의 회고록 <바위에 새긴 눈물, 삶으로 피어나다>를 함께 펴낸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이모세 회장의 말이다.

그의 선친 고 이명하(1913~96) 선생은 죽산이 1956년에 만든 진보당 조직부장을 지낸 최측근이었다. 우사 김규식과 함께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 운동을 하다 한국전쟁 때 우사가 납북된 뒤에는 죽산과 정치적 연을 맺고 1959년 죽산의 마지막 순간까지 옆을 지켰다. 죽산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한 이튿날 아침 서대문형무소에서 유족을 대신해 주검을 인도받은 이도 그였다.

2대째 ‘죽산 팬’이라는 이 회장은 중1 때 죽산의 주검을 직접 본 기억도 있다. “아버지가 그때 저에게 ‘모세야, 선생님 얼굴을 똑바로 봐라. 언젠가 반드시 네가 이 일에 관해 이야기할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 사업회 사무실에서 이 회장과 죽산 외손녀 이성란씨·남편 유수현 사업회 상임이사를 함께 만났다.

<죽산 조봉암 평전-자유인의 길> 표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 8년 가까이 옥고를 치른 죽산은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며 농지개혁을 이끌었고 이승만 독재에 맞서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도 나섰다. 특히 진보당 창당을 준비하며 출마한 1956년 3대 대선 때는 극심한 선거 부정 속에서도 216만표를 얻어 이승만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는 3년 뒤 권력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그리고 반세기가 흘러 지난 2011년 대법원은 죽산의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회장은 이번에 ‘자유인의 길’이란 제목을 달고 나온 평전을 두고 “젊은 세대에게 오늘날 왜 죽산이 화두가 되어야 하는지 알려주기 위한 의도가 크다”고 밝혔다. 평전을 쓴 이택선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우남 이승만 평전>을 쓴 이승만 연구자이기도 하다. “그동안 죽산에 대한 책이 여러 권 나왔지만 주로 죽산의 억울한 죽음이 초점이었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죽산이 진보당 제1 강령으로 채택한 평화통일이나, 혁명이나 다름없는 농지개혁으로 보여준 경제민주화 업적 등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새 평전을 내고 싶어 이승만과 조봉암을 함께 연구한 이 박사에게 집필을 의뢰했어요.” 실제로 한 연구를 보면 ‘조봉암 농지개혁’으로 1945년 14.2%였던 자작농 비율이 6년 뒤 80.7%로 올랐다. “농지개혁으로 많은 소작농이 자작농이 되면서 자식들을 공부시킬 수 있었고 그 덕에 나라가 발전했죠. 민주화나 인권 신장도 가능했고요.”

이 설명처럼 평전은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 혹은 사법살인 희생자 조봉암의 면모보다는 그가 1948년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해 이승만과 협력하며 농지개혁과 국가 주도 계획경제를 이끌다, 이승만 독재가 노골화하면서 권력자와 맞서게 되는 과정에 비중을 뒀다. 1959년엔 이승만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저자가 조봉암 사법살인의 주도자로 당시 실세로 군림했던 경무대 비서 박찬일을 지목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고 조호정 선생은 죽산의 의정활동 비서로 수행했고 부친의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회고록에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늘 속옷까지 단정하게 의복을 챙겼고, 또 유난히 동물을 좋아했던 죽산의 일상과 함께,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김조이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기억도 많이 담겼다. 한국전쟁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납북 당한 죽산의 첫 부인 김조이는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지난 2008년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다. 조호정 선생의 생모는 죽산의 둘째 부인(김이옥)으로 딸이 다섯살 때 폐결핵으로 별세했다.

조봉암 새 평전 ‘자유인의 길’ 펴내
‘이승만 연구자’ 이택선 교수 집필
‘죽산 사형 주도’ 박찬일 비서 지목
죽산 맏딸 고 조호정 선생 회고록도
‘첫부인 김조이’ 납북 경위 등 담겨

“보훈처가 직접 서훈 나서면 협조”

조호정 선생은 김조이 어머니가 납북에 이르게 된 경위를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부친이 한강다리가 폭파된다는 소리를 듣고 종로 운니동 집에 들러 함께 피난을 가자고 했으나 어머니께서는 “비서나 운전기사분들도 모두 집에 연락할 겨를도 없이 홀로 떠나는데 우리만 식구가 같이 갈 수 없다”며 아버지의 등을 떠밀었다.’

“엄마 말로는 김조이 할머니가 보통 분이 아니었어요. 여자로서 집안 살림도 깨끗하고 야무지게 잘하고 바깥 일도 강단 있게 하셨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등 떠밀었을 때 할아버지도 머뭇거렸을 겁니다. 피난 차량에 할아버지가 급히 챙긴 중요한 국회 서류가 가득해 탈 공간이 부족한 이유도 있었겠죠.”(이성란)

죽산과 김조이 부부(가운데)가 딸 호정(전등 왼쪽 서 있는 이)씨 친구들을 초대했을 때 사진이다. 유수현 상임이사 제공

죽산 사위인 이성란씨의 부친은 시인이자 영화감독으로 1970년대에 예총 회장을 지낸 고 이봉래 감독이다. 이 감독은 1965년 죽산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를 만들기도 했다. 당대 스타 김진규·신성일이 출연한 이 영화는 당국의 심한 검열로 여러 군데 가위질을 당한 채 영화관에 걸렸단다. “아버지는 인품도 좋고 언변이나 설득력이 뛰어나 정치에 대한 꿈도 있었겠지만, 조부의 억울한 죽음에 충격이 컸던 어머니가 너무나 단호하게 반대한 때문인지 정치는 하지 않으셨죠.”(이성란)

죽산은 3·1운동을 포함해 일제 때 세 차례나 옥고를 치렀지만 아직 독립운동 서훈을 받지 못했다. 총독부에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1941년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 기사 때문이란다. “대법원 무죄 선고 전후로 두 번 서훈 신청을 했으나 보훈처가 치졸한 사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일제는 1945년 1월 전세가 기울자 예비검속을 한다며 죽산을 헌병대로 끌고 가 해방 때까지 구금했어요. 일제가 이렇게 불령선인으로 지목한 분을 친일로 모니 납득이 되지 않아요. 앞으로 사업회에서는 직접 서훈 신청을 하지 않을 겁니다. 죽산은 몽양과 같이, 최고 훈격인 대한민국장을 받을 만한 분입니다. 마땅히 보훈처가 나서서 죽산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해 서훈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사업회도 적극 협조할 겁니다.”(이모세)

이 회장은 죽산의 동지나 유족이 아니지만 사업회장을 맡았다. “저에게 죽산은 큰아버지와 다름없으니 사실상 저도 유족이죠. 우리 집안 가훈도 ‘등 돌리지 말자’입니다. 제가 알기로 죽산의 정치적 동지 중 죽산에게 등을 돌린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고려대 통계학과 학부·대학원을 나온 이 회장은 유신시절 ‘연좌제’ 때문에 외국 유학이 좌절되자 학자의 꿈을 접고 보험회사에서 선박사고 전문가로 살아왔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실향민이었던 그의 부친은 아들에게 “민족을 끌고 고향(함경도 북청)으로 가라”는 염원을 담아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단다. 실제 진보당에는 함경도 출신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감리교인이었던 죽산은 진보당 창당의 첫 출발 모임이었던 1955년 9월 광릉 회합 때 기독교장로회 교단 소속 고 조향록 목사에게 따로 축도를 요청하기도 했죠. 조 목사님이 이 부탁을 받고 ‘정치모임인데…’라며 당황했다고 해요.”(이모세)

<바위에 새긴 눈물, 삶으로 피어나다> 표지

이 회장은 죽산이 농지개혁과 평화통일론을 펼칠 수 있었던 데는 기독교 사상에 더해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며 치열한 삶을 산 것도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 “죽산은 초등학교만 나와 강화군에서 사환으로 일했고 중고교 과정은 경성와이엠시에이(YMCA)에서 공부했고 일본 유학을 가서도 고학을 하면서 주로 청강을 했어요. 사회주의를 배운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도 몸이 아파 자퇴했어요. 농민의 아들로 세상의 많은 것을 겪었기에 나라의 진로에 대해 깊게 사고했고 생각과 행동도 일치했죠.”

‘지금 죽산이 살았다면 이 땅의 현실을 두고 어떤 말을 했을지’ 물었다. “마음 아파했을 겁니다. 죽산의 꿈은 국민이 고루 잘 사는 것인데요.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잖아요.”(이모세) “이승만 정권 시절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몬 정치 행태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아요.”(이성란)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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