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명칼럼] 한국은 일본과 다를 수 있을까
1987 체제로 타락하는 韓 정치
일본 경제가 고전하는 이야기를 들어온 지 참 오래되었다. 한때는 그 이야기가 '재벌 돈 걱정'처럼 실감 나지 않을 때도 있었으나 10년, 20년 지나는 동안 일본은 예상보다 빨리 쪼그라들었다. 단적인 예로 일본 경제가 정점을 찍던 1995년 4만4200달러였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3만4300달러로 순감했다. 같은 기간 미국은 2만8600달러에서 7만5100달러로, 한국은 1만2500달러에서 3만3500달러로 늘었는데 말이다.
일본 지식사회에서 일본이 '이류국가'가 됐다는 자조가 유행한 지도 꽤 됐다. 엄살이 섞인 얘기다. 나는 일본의 국가 규모, 문화적·역사적 저력으로 볼 때 내 생애 중 일본이 이류국가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훨씬 젊었을 때 질시하고 경원했던 '초일류 일본'을 다시 보기는 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본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노구치 유키오 같은 경제학자는 '1940년 체제'에 안주한 데서 원인을 찾는다. 국가가 이끌고 할당하는 총동원체제로서의 산업·금융시스템, 종신고용을 근간으로 하는 공동운명체적 기업·노조 관계가 1940년을 전후한 전시체제에서 성립되었다. 이것은 패전 이후에도 고스란히 이어져 1960~1980년대 고도성장기를 이끈 견인차가 된다. 문제는 세계 경제와 산업이 IT 혁명에 이어 4차 산업혁명에 이른 지금까지 그 체제 그대로라는 것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 한때 고속 성장 비결이었던 1940년 체제가 수십 년째 일본의 창의를 가두는 감옥이 되고 있다.
한국은 정부 주도 산업화라는 측면에서 일본 모델의 충실한 계승자지만 두 가지 차별점이 있다. 첫째는 'IMF 체제' 때 외과수술을 한 번 받았다는 것. 그것은 아찔한 고통이었지만 속성의 구조조정과 더불어 한국 사회에 '정부는 믿을 수 없다'는 값진 각성을 선물로 안겼다. 두 번째, 한국 기업은 여전히 오너십에 의해 구동된다. 2000년대 이후 한국 기업이 일본보다 더 빨리, 과감하게 투자해서 성공했다면 그것은 양국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 차이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 한국이 일본처럼 '곱게 늙어 죽는' 인상을 아직 풍기지 않는 것은 기업 역동성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동적 기업을 빼면 한국은 일본보다 나을 게 없다. 한국은 여전히 연공제 사회이고, 노동의 유연성은 빵점이고, 일본에 비해 제조업의 단계는 낮다. 고정밀·첨단소재 산업으로의 등급 상향은 수십 년째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선진국 그룹 안에서도 성장률이 처진다. 또한 일본보다 고령화 속도가 빠르다. 세금 문제만으로도 오너십 경영은 끝물에 왔다. 한국 기업은 다음 세대에서도 지금처럼 역동적일까.
나는 일본의 침체를 설명하는 틀로 '1940년 체제론'이 일리 있다고 보지만 '왜 일본은 그 낡은 체제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을 느낀다. 결국 정치 문제 아닐까 한다. 시대가 변하고 생존 조건이 바뀌면 그에 맞춰 변해야 살아남는다. 이때 정치가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면 훌륭하다. 고도개발시대 한국과 일본은 그랬던 것 같다. 정치가 사회의 변화를 담아낼 만큼 열려 있기만 해도 괜찮다. 서구 선진국들이 대부분 그렇다.
반면 정치가 변화를 가로막는 사회는 위태롭다. 지금 한국과 일본이 그런 증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 정치는 그들의 경제만큼이나 무기력해서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 '선수 교체'만 잦을 뿐이다. 지금 한국 정치는 '1987년 체제'에 기반하는데 갈수록 이상해지고 있다. 갈등에 몰입하느라 최소의 도덕, 양식, 옳고 그름과 경중을 못 가리는 지경까지 왔다. 5년마다 모든 것이 원점이 되는, '도로(徒勞)'의 정치이기도 하다.
늘 일본보다 후행하는 한국엔 '일본화'를 피해 갈 시간이 남아 있다. 그러나 수명을 다하다 못해 사악해지기까지 한 1987년 체제의 정치를 이대로 두고선 일본처럼 곱게 늙지도 못하고 한순간 처절하게 몰락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든다.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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