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만 개쯤 얹힌 듯, 답답한 '트롤리'를 위한 변명
[엔터미디어=정덕현] 의도는 번번이 예상을 벗어나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틀어진 드라마의 흐름은 어쩐지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똑같은 궤도를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SBS 월화드라마 <트롤리>를 보는 시청자들은 아마도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 <트롤리>는 김혜주(김현주)와 남중도(박희순) 부부의 어떤 선택들이 의외의 결과를 불러오고 그래서 또 다른 선택을 하지만 그것 역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또 다른 문제를 양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자살을 했지만, 여론에 몰린 가해자 역시 자살을 하는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가해자가 죽으면 공소권이 사라지는 법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남중도 의원이 법 개정을 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살한 피해자가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이 공개된다. 여론은 요동친다. 성매매를 한 여성이 무슨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느냐는 비난의 목소리들이 등장하는 것.
여기에 김혜주가 과거 영산에서 겪었던 비슷한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올 위기에 처한다. 이유신(길해연)의 아들에 의해 성추행을 당했던 김혜주가 이를 경찰에 고발하려 하자 자살을 해버린 사건이다. 결국 당시에도 가해자의 죽음으로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고 김혜주는 엉뚱하게도 전도유망한 한 청년을 죽게 만든 '살인자' 취급을 받게 된다.
남중도의 정적인 강순홍(장광) 의원에 의해 이 사건이 폭로될 위기에 처하자 남중도 의원은 김혜주에게 선제적으로 TV에 나가 이 사건을 알리자고 설득한다. 피해자들을 위한 법안을 통과시켜 다시는 자신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일은 그러나 희생을 요구한다. 법안 통과라는 열차가 달려가려는 방향을 유지하려면 김혜주도 나아가 이 사건과 관련된 이유신도 과거의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는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딜레마는 <트롤리>라는 드라마가 끊임없이 보여주는 상황이다. 어떤 선택은 선의나 정의를 위한다고 해도 엉뚱한 희생과 피해를 만들어낸다는 것. 사회에서는 더 많은 이들을 위한 희생이 정당한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트롤리>는 그 상대적으로 적은 수치지만 희생당하는 이들의 상처가 결코 당연하게 감당될 수준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이러니 드라마는 답답할 수밖에 없다. 선택 하나도 쉽게 할 수 없고 그래서 김혜주가 주저하고 갈등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고구마 만 개의 답답함을 안긴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김혜주가 겪는 이 갈등이 이 드라마가 실상 보여주려는 메시지이자 주제의식이다. 김혜주는 자신이 피해를 입을 것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선택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 또한 두려워한다. 그러니 주저하고 또 주저할 밖에.
사이다 혹은 고구마. 최근 드라마를 단순하게 나누는 이 기준은 그만큼 드라마를 통해 '효능감'을 얻고픈 현 대중들의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 문화를 소비하는 여유 자체가 그다지 없기 때문에 보면서 즉각적으로 느끼는 '사이다' 같은 효능감을 원하게 된 것. 그게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이 양분된 기준으로 보면 <트롤리> 같은 딜레마를 다루는 드라마는 그저 단순하게 '고구마 만 개'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전개가 답답한 건 사실이지만, 그 과정이 왜 그리 답답한가를 생각해보면 이 드라마가 하려는 진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정의나 선의라고 해도 어떤 선택이 야기할 결과는 그리 단순명쾌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수한 관계들로 얽혀있는 사회 속에서 단순히 선과 악으로 양분할 수 있는 그런 구분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 물론 지금의 달라진 시청자들의 드라마 소비 패턴에 맞는 효능감 있는 작품이 아니라는 아쉬움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작품의 이러한 의도가 갖는 가치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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