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의 인생역전

2023. 1. 3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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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음악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특히 빈(Wien) 고전주의에 대한 자부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강하다. 빈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3대 음악가라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다.

그 중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이 최고 연장자인데 모차르트보다 24세, 베토벤보다 38세 더 많다. 그는 100개가 넘는 교향곡을 썼고 또 현악4중주를 확립했기 때문에 ‘교향곡의 아버지’, ‘현악4중주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사실 그는 교향곡뿐만 아니라 협주곡, 현악4중주와 소나타 등 고전주의 형식의 기틀을 확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낭만파의 싹을 트게 했으니 모차르트, 베토벤에 이어 슈베르트도 그에게 음악적으로 많은 빚을 진 셈이다. 빈에서 그의 자취를 한번 찾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소년시절 하이든이 성가단원으로 봉직한 슈테판 대성당.

빈 한복판에는 고딕양식의 성 슈테판 대성당이 우뚝 솟아있고 그 주변에 황궁을 비롯한 주요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세련되고 귀족적인 기품을 지닌 도시 빈은 크리스마스 불빛이 거리를 장식할 때 그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인다. 빈 중심가에 있는 콜마르크트(Kohlmarkt)는 황궁 입구인 미하엘러토어(Michaelertor)와 직선으로 연결되는 명품거리이다.

이 거리 11번지 건물 윗 층 외벽에는 하이든기념 명판이 보인다. 하이든은 이 집의 지붕 바로 밑 구석진 방에서 1750년부터 5년 동안 살았는데 그가 태어난 해가 1732년이니 이 허름한 다락방에서 18세부터 23세까지 살았다는 뜻이다. 
 
하이든이 태어난 곳은 수도 빈에서 45킬로미터 동쪽 작은 도시 하인부르크 근교에 있는 로라우(Rohrau)라는 촌구석이다. 그는 6세 때 하인부르크에서 소년 성가대원이 되었는데 8세가 되던 1740년, 빈의 슈테판 대성당의 음악감독 게오르크 로이터가 우연히 하인부르크에 들렀다가 소년 성가대에서 어린 하이든이 부르는 노래에 감명을 받고는 당장 그를 빈으로 데려왔다.

이리하여 하이든은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 소년 성가대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무한히 넓은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물론 이곳의 엄격한 규율 때문에 생활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무명의 젊은 하이든이 살던 다락방의 창문과 기념명판.

그는 9년 후에 변성기를 맞아 소년 성가대를 그만 둔 다음에는 혼자서 매우 힘든 상황을 헤쳐 나가야 했다. 그때 그가 살던 곳이 바로 이 다락방이었는데 겨울에는 난방도 되지 않았다. 고달픈 떠돌이 음악가로 겨우 연명하던 그는 우연히도 인생의 반환점을 맞게 되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오페라 대본작가인 메타스타지오(1698-1782)가 마침 같은 건물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하이든에게 음악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주었을 뿐 아니라 음악계의 유명인사들도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하이든의 석상.

이 일을 계기로 마침내 그는 1761년에 유력 귀족가문 에스테르하지 소유 오케스트라의 부악장으로 초빙받고 빈에서 남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영지 아이젠슈타트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약 30년 동안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위해 일하면서 수많은 곡을 썼다.

물론 개인적인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는 없었다. 그의 신분은 어디까지나 특권과 지위가 주어진 ‘존경받는 충실한 하인’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 덕택에 그의 작품은 가장 권위 있게 외부에 알려질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쓴 불멸의 작품 대부분은 그곳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작곡된 것이다.
 
아이젠슈타트 활동 시기가 끝난 다음 그는 수도 빈으로 와서 당시 빈의 외곽 마을에 집을 구입하여 여생을 보내게 되는데 이 시기에 그는 영국을 두 차례 방문, 그곳에서 대규모의 걸작을 발표하여 영국 청중들을 사로잡았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도 받았다. 얼마 전까지 하인신분이었던 그는 최고의 명사가 되어 귀족들과 어울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08년 3월 27일. 그날 그의 76세 생일을 축하하여 빈 대학이 마련한 그의 기념비적인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공연에 앞서 그는 팡파르가 울리는 가운데 청중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입장했다.
 
그런데 곧 국제정세가 급변하여 다음해인 1809년 프랑스 군대가 빈을 점령했다. 나폴레옹은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노장 하이든을 특별히 보호하도록 했으나 그해 5월 31일 하이든은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그의 장례식에는 빈 시민들 뿐 아니라 프랑스 점령군 장교와 근위병들도 깊은 애도를 표했다. 하이든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청년기에 어려움과 시련을 적지 않게 겪었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면서 생의 후반에는 유럽 최고의 음악가로 크게 존경받았던 것이다.

하이든이 말년에 살던 집. 지금은 하이든 박물관이다.

하이든이 마지막으로 살던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며 위치는 현재 분주한 쇼핑거리인 마리아힐퍼슈트라쎄(Mariahilferstrasse) 근처이다. 이 거리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성당 앞 광장에는 1887년에 그의 기념상이 세워졌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culturebo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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