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경의 에듀 서치] ‘늘봄학교’ 필요한 정책이지만 ‘정답’은 아니다

이도경 입력 2023. 1. 31. 04:0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늘봄학교 추진 방안 브리핑을 하고 있다. 오는 3월 새 학기부터 5개 시·도 200개 초등학교에서 오후 8시까지 원하는 학생이 돌봄교실 등을 이용할 수 있는 늘봄학교가 시범 운영된다. 교육부 제공


웃을 때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녀였습니다. 희고 갸름한 얼굴에 순진해 보이는 큰 눈을 껌뻑이다 미소 지으면 두 볼에 보조개가 깊이 파였습니다. 이를 보이며 웃을 때 뚜렷하게 드러나는 빠진 윗니 하나가 독특한 분위기의 원천인 듯했습니다. 가출청소년들의 치아 건강이 특히 문제라는 얘기가 떠오르기도 했죠. 학교를 제대로 다녔으면 고2라고 했습니다.

계부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왔다고 했습니다. 성적 학대도 있었다고 하고. 듣는 이가 힘들 정도로 구체적인 사연이었습니다. 아이가 돌아가고 인터뷰를 주선해준 목사님에게 의부는 형사처벌이 됐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기자님도 당하셨군요”라며 껄껄 웃었습니다. 의부라는 사람 자체가 없고 생부·생모와 줄곧 살다가 관계가 틀어져 나온 아이라는 겁니다. 거짓말이 일상이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비극의 레퍼토리’가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며칠 뒤 다시 아이를 만났습니다. “언제 그런 말 했어요”라며 잡아떼면서 되레 언짢아했습니다. 남자친구라는 또래 소년이 옆에서 재미있다는 듯 기자를 보며 웃었죠. ‘허무 개그’의 주인공이 됐지만 인터뷰 녹취록으로 추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돌아가며 깔깔 웃어 대던 모습이 기억 납니다. 2013년 겨울 비행청소년 실태를 취재하며 겪은 일입니다. 10년이 흘렀으니 그 아이들은 이제 20대 중후반이 됐겠네요.

학교폭력과 학교 밖 청소년, 가출팸(가출 청소년 무리) 등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던 때였습니다. 온 사회가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떠들썩했죠. 기자도 동료 기자들과 가출청소년이 모이는 곳에서 햄버거를 사주며 아이들을 ‘포섭’해 인터뷰하곤 했습니다. 다양한 루트를 통해 60명쯤 만났습니다. 믿을만한 사연이라고 판단한 40명을 추렸고, 전문가 도움을 받아 분석 작업도 했습니다. ‘애들은 도대체 왜 이럴까’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게 목표였습니다.

가정 특히 부모와의 관계가 문제라고 결론 내린 걸로 기억합니다. 다른 문제 대부분은 여기서 파생된 것들이었죠. 아이들은 커가며 공부 스트레스나 교우 관계, 진로 문제 등 다양한 성장통을 겪습니다. 관건은 ‘회복 탄력성’입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지지를 받아온 아이는 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습니다. 결손가정이라도 아이들에게 버팀목이 되는 보호자가 있다면 가능한 얘기일 겁니다.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긴 했지만 ‘윗니 빠진 소녀’도 경제적 어려움과 이로 인한 부부싸움 등을 목격하고 커왔다고 합니다.

당시 취재 자문을 맡은 조벽 고려대 석좌교수(이 분야의 손꼽히는 실력자여서 별도 소개는 필요 없을 듯합니다)도 취재팀 결론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국가가 부모와 아이들을 떼어놓는 방향으로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다.” 당시 정부도 저출산 극복을 위해 대책들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낳기만 하라 국가가 키워준다’는 구호를 내걸고 말이죠.

10년 전 취재 파일을 뒤적이게 만든 건 윤석열정부의 역점 사업인 ‘늘봄학교’였습니다. 오전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학교가 아이들을 맡아준다니, ‘국가가 부모와 아이를 떼어놓는’ 정책으로는 최첨단이었습니다. 아침 돌봄에 이은 정규수업, 방과후 수업, 저녁 돌봄으로 이어지는 코스입니다. 2025년부터 모든 초등학생들은 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답니다. 당연히 강제는 아닙니다. ‘희망자에 한해’란 단서가 달렸고 마음에 드는 방과후 프로그램이 없거나 학교에서 아이가 방치된다고 여기면 학원 등으로 아이를 빼낼 수 있습니다.

필요한 정책이라고 봅니다. 초등학생을 키우는 맞벌이 부부, 특히 워킹맘에게 점수 딸 수 있는 정책이죠. 아이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발을 동동 구르거나 ‘학원 뺑뺑이’ 외에는 답이 없어 사교육비 부담에 등골이 휘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습니다. 집에서 방치되거나 학원 버스 타고 이리저리 다니는 것보다 학교에서 ‘원스톱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학부모에게 유용한 ‘옵션’ 하나 더 생기는 것이죠. 한 워킹맘은 “급한 일이 생겼을 때 학교에 저녁 8시까지 맡길 수 있으면 마치 아이의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옆에 사는 듯 든든할 거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찜찜함이 남는 게 사실입니다. 학부모가 환영하는 정책이 반드시 아이들에게 좋은 정책이란 보장은 없습니다. 오랜 만에 전화가 연결된 조 교수는 늘봄학교에 대해 “정부가 학부모의 육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점은 평가받을 만하지만 여전히 육아에서 해방시켜주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는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고 아쉬워했습니다. 부모와 아이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돕는 교육·복지·노동에 대한 종합적 정책을 고민한 흔적은 아직 없다는 겁니다.

정부가 미취학 아동을 위한 유보통합부터 초등학생을 위한 늘봄학교까지 보육·교육 체계를 대대적으로 손질하고 있습니다. 이들 제도가 부모 역할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단지 거드는 용도란 점을 명확히 해달라는 취지의 조 교수 당부를 전합니다. “화초는 자주 옮겨 심으면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 뿌리를 단단히 못 내린 식물은 작은 바람에도 쉽게 넘어간다. 어릴 때 여러 사람에게 맡겨지며 성장한 아이들도 비슷할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넘어진 아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청소년 자살률은 껑충 뛰고, 마약에 손대는 아이들도 늘어 갑니다. 폭력성은 어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손찌검하거나 성희롱하는 데 이르렀죠. 늘봄학교, 필요한 정책이지만 ‘정답’이라고 보기엔 여전히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