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권에서 첫 한국 문화예술 소개서로 인정받았어요”

김경애 2023. 1. 30.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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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재프랑스 미술사학자 류내영 박사

지난해 12월 초 잠시 귀국한 류내영 박사가 서울 부암동의 카페 몽유도원 도이창의 옥상에서 자신이 번역해 펴낸 프랑스어판 <고구려 고분벽화, 놀라운 한국의 장례 예술> 책을 소개하고 있다. 김경애 기자

“첫 번역 시작부터 출판을 거쳐 ‘오귀스트 파비상’을 받기까지 꼬박 15년이 걸렸네요. 개인적으로 프랑스 유학의 주목적인 박사학위를 받은 데 이어 최대의 연구 성과를 인정받은 셈이어서 물론 기쁩니다. 그보다 더 뜻깊은 것은 프랑스를 비롯한 전세계 프랑스어 문화권에 처음으로 한국의 문화예술을 소개하는 책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상의 수상은 고구려 문화와 고분벽화가 한국학의 울타리를 벗어나 프랑스어권 동양학계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지난 12월초 한국을 다녀갔던 재프랑스 미술사학자 류내영(59) 박사가 최근 전자우편을 통해 출판상 수상 소식과 함께 시상식 사진을 보내왔다. 그는 이탈리아인 남편이자 영상인류학자 안드레아 파가니니와 함께 ‘한국 1세대 미술사학자’인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의 저서 <고구려 회화, 고대 한국문화가 그림으로 되살아나다>(2007·효형출판사)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고구려 고분벽화, 놀라운 한국의 장례 예술>(Fresques de Koguryŏ. Splendeurs de l’art funéraire coréen (IVe-VIIe siècle), 2021·에미스페르 출판사) 책을 펴냈다. 그는 이 책으로 지난해 12월16일 프랑스 공립아카데미인 해외학사원(해외과학학술원)에서 수여하는 '오귀스트 파비상’을 받았다. 해마다 11개 분야에서 책 한권씩을 선정해 시상하는데, 19세기말 라오스의 초대 총독을 지낸 외교관이자 탐험가인 오귀스트 장 마리 파비(1847~1925)의 이름을 딴 이 상은 아시아·인도차이나·태평양 지역을 다룬 작가나 학자에게 준다. 1983년 제정된 이래 한국인이 한국문화 책으로 수상한 건 류 박사가 처음이다.

지난 1997년 프랑스로 유학해 현재는 파리 근교 장티이유에서 살고 있는 류 박사를 온·오프라인으로 만나봤다.

‘고구려 고분벽화, 놀라운 한국의 장례 예술’
안휘준 원저 번역 15년만에 출판
지난해 프랑스 ‘오귀스트 파비상’
해외학사원 선정 한국인 첫 수상

성균관대 학·석사 1997년 파리로
2017년 ‘윤두서 작품세계’로 박사학위

류내영 박사가 지난해 12월 16일 파리 16구에 있는 프랑스 해외학사원에서 ‘오귀스트 파비상’을 받고 수상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류내영 박사 제공
오귀스트 파비상을 시상하는 프랑스 해외학사원은 1922년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 등 비유럽권의 지리와 역사 분야와 관련된 학술활동을 하는 공립학술단체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한다. 류내영 박사 제공

“애초 안 교수님의 책은 2007년 나오자마자 한국문학번역원의 번역지원도서로 선정되었고, 프랑스어 번역본도 높은 완성도를 평가받았어요. 하지만 한반도의 고대 국가 고구려의 문화와 고분벽화에 관심을 두는 프랑스 출판사를 찾기는 어려웠어요. 한국의 전자, 자동차, 엔터테인먼트산업 등의 성장으로 ‘한류’(K-컬쳐)가 무르익기까지 기다려야 했던 셈이요.”

지난 2020년께 마침내 프랑스의 동양문화 전문출판사인 에미스페르 출판사를 찾아낸 류 박사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고대 한국 문화 속에서, 고구려는 한국사의 가장 강력한 고대 국가이고 고구려 고분 벽화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회화이다. 그런만큼 특별히 유럽의 ‘예술서적’ 양식으로 펴내 도상의 가치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설득했다.

“프랑스어로 고구려 고분벽화를 제대로 소개한 책도 없었고, 고구려라는 나라도 모르는 상태인 독자들에게 고분벽화 자체를 먼저 보여주면 그 우수한 회화성과 풍부한 내용을 직접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그때부터 그는 국내 관련 기관들의 수장고와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양질의 도상을 찾는 데 몰두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고구려 고분벽화의 복제 이미지 제작 역사와 제작 유형에 대한 연구 결과를 부록으로 덧붙여 놓았다. “특히 텍스트와 그림을 분리해 프랑스어를 모르는 이들도, 이론에 관심없는 이들도 고분벽화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느낄 수 있도록 편집했어요.”

모두 109점의 도상들로 구성한 이 부록은, 프랑스 중국학자 에두아르 샤반이 1907년 흑백 유리 건판에 처음으로 촬영한 사진부터 일제강점기에 촬영되고 제작된 흑백·삼색 유리 건판 사진부터 최종적으로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수작업으로 벽면 전체를 복원하여 제작한 디지털 복원도 그리고 이러한 도상들이 인쇄되어 유포된 도서들과 엽서에 이르기까지 확인이 가능한 모든 복제 유형과 유포 매체들을 망라해놓았다. 더불어 흑백 필름 사진, 실물 크기의 모사도와 축소 모사도, 무덤 내부 또는 벽화의 형상이나 문양을 윤곽선을 따라 소묘한 견취도, 그리고 해방 이후 북한에서 촬영된 천연색 필름 사진과 벽화의 윤곽선을 따라 소묘한 모사도, 마지막으로 이러한 도상들이 실린 도서들과 엽서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모든 복제 유형과 인쇄 유포 양식들을 소개해놓았다.

“다만, 북한 만수대 창작사에서 제작한 실물 크기를 능가하는 벽화의 모사도와 실물 크기로 재현한 무덤 모형, 1993년남한이 촬영한 북한 지역 고구려 고분과 벽화 사진 그리고 남북한 공동연구 기간 중에 촬영한 천연색 사진, 중국과 일본에서 해방 이후에 계속해서 제작되고 있다고 알려진 사진들과 모사도 등은 책에 싣지 못해서 아쉬워요. 새삼 분단의 벽을 실감하기도 했죠.”

해방 이후 서로 왕래를 할 수 없게 되면서 남한에서는 일제시대 때 했던 일본인들의 조사나 연구를 통해 고분 벽화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안휘준 교수의 책도 일본인들의 연구 결과를 주로 참조해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또 2004년 북한소재 고구려 고분 16기와 중국소재 고구려 고분 40기 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실물 벽화가 평양과 지린성 지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까닭에 남한 쪽에서는 원작 회화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여기에 일본까지 가세해 고분 벽화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소유권과 정통성을 둘러싼 동북아 4개국의 갈등이 연구의 걸림돌이자 앞으로 해결해야할 과제인 셈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놀라운 한국의 장례 예술>의 표지. 에미스페르 출판사 제공
안휘준 교수의 <고구려 회화-고대 한국 문화가 그림으로 되살아나다>의 표지. 효형출판사 제공

이런 아쉬움은 있었지만, 책은 유럽 학계에서 먼저 호평을 받았다. 지난해 6월 벨기에와 프랑스의 한국문화원과 공동주최로, 벨기에의 브뤼셀 루벤대학과 파리의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겸 컨퍼런스와, 파리시테대학(옛 파리 7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에는 현지인들이 좌석을 가득 채울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컨퍼런스에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인 미술사학자 유홍준 석좌교수가 ‘동북아 예술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의 위상’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류박사는 고구려 고분벽화 발전사와 함께, 고구려 멸망(668) 이후 1300여년이 지나서 남한과 북한이 상호 협력해 고구려 고분벽화를 복원한 이야기 등을 소개했다. 120여년에 걸친 벽화 복제 이미지 제작 역사를 세분화하여 해방 이후 북한과 남한의 복제 역사를 중심으로 발표하면서 책에 싣지 못했던 이미지들도 보여줄 수 있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과 한성백제박물관의 두 상설 전시실에 소개되어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 디지털 복제 이미지는 한국의 뛰어난 디지털 기술 덕분에 고유한 예술작품인 원작으로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대체하는 것 이상의 새로운 의미를 띠고 있어요.”

뒤 이어 파리시테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는 피에르 캉봉 국립아시아기메박물관 한국미술담당 수석 큐레이터가 ‘고구려 고분벽화 발달사’를, 파트릭 모리스 국립동양언어문화대학 명예교수가 ‘동북아 역사 속에서 고구려사’를 발표했다. 고려불교연구자인 같은 대학의 한국학과 학과장 야니크 브뤼느통 교수는 개회사와 토론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의 불교적 특성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프랑스의 한국학계는 일찍이 1908년 가장 먼저 고구려 고분벽화의 존재를 알린 ‘발견국’이었어요. 그뒤 1956년 파리로 건너와 소르본느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하며 한국학의 초석을 놓고, 훗날 파리 7대학의 한국학과 학과장을 지낸 이옥 교수가 한국고대사에 대한 연구서에 고구려 문명과 고분벽화를 소개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후 관심권에서 멀어졌다가 수십년 만에 종합적인 벽화 연구서가 나오니 놀라워했지요.”

류 박사는 “행사 참석자들 사이에 ‘정말 반갑다’는 반응이 많았다. 파리 한국문화원에서 30여년을 근무한 프랑스인은 고분의 중요성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종합적인 책이 불어판으로 나온 것은 ‘사건'이라고까지 얘기했다”라고 덧붙였다.

류 박사가 이처럼 벽화의 도상 이미지를 살린 책을 기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남다른 연구 이력이 깔려있다. 1988년 성균관대 불어불문학과에 이어 93년 같은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과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애초 영화 이론 비평을 연구했다. 1997년 프랑스로 건너가 어학연수를 한 뒤 98년부터 3년간 파리 1대학 팡테옹-소르본느 미학과 박사준비과정을 거쳐 2000년부터 6년간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그동안 영상 이미지, 만화영화, 중국 회화 등에 대한 연구를 주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7년 10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국립동양언어문화대학에서 예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논문 주제는 바로 ‘전근대 시기의 한국의 문인화가 윤두서(1668-1715)의 작품 세계’였다.

“조선시대 최초인 윤두서의 자화상를 비롯한 인물화를 연구하고 소개하면서 텍스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림 그 자체 만으로도 의미 전달이 가능하다는 경험을 했거든요.”

실제로 이번 고구려 벽화 책은 오귀스트 파비상 수상을 계기로 불어권, 특히 캐나다에서 기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순조롭게 팔리고 있다고 그는 전했다.

“출판사에서 벽화 전시회를 해도 좋겠다는 제안을 받아 국내 정부기관 쪽에 타진을 해봤는데 비용 문제 등으로 중단됐어요. 또 책을 보완할 내용도 많아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후속 연구를 위한 지원을 요청했는데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어요.”

류 박사는 “평생을 두고 연구해야 할 주제이고, 이번 책은 그 시작인 만큼 긴 호흡으로 저술과 함께 한국문화를 알리는 활동을 계속 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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