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다채로워야 할 ‘정책의 산실’은 제 역할 하고 있나?

이창곤 2023. 1. 3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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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곤의 정담][이창곤의 정담] 17 _싱크탱크1

2020년 기준 세계 각국에서 싱크탱크 1만1175곳이 활동 중이다. 정책시장과 정책산업이 가장 활발하게 연계돼 돌아가는 미국(2203개)이 세계 1위 싱크탱크 보유국이었고, 중국(1413곳)과 인도(612곳), 영국(515곳)이 그 뒤를 이었다. 놀랍게도 5위는 대한민국이었다. 프랑스(275곳), 독일(266곳)보다도 많은 412개 싱크탱크가 활동 중이다.

페이비언협회 포스터

빅토리아 여왕 시대(재위 1837~1901)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나라였다.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렸고 자본주의와 기술진보의 선두주자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세계 석탄 생산량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세계 해상수송선의 60%를 소유했다. 국민 수명이 길어졌고 영아사망률도 뚝 떨어졌다. 수세식 화장실과 붙박이 욕조가 생활필수품으로 등장한 것도 이즈음이다.

윤택해진 삶의 다른 한쪽에는 런던 시민 열에 셋이 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또 다른 현실이 있었다. 찰스 디킨스가 기사와 소설을 통해 고발했듯이 노동자와 도시 빈민의 삶은 너무 비참했다. 슬럼가 방 한칸에 십수명이 모여 살았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철야노동에 시달렸다. 영국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시기도 그 무렵이었다.

이런 현실을 예민하게 주시하던 일군의 지식인들이 1884년 런던의 한 저택에서 뭉쳤다. 대체로 부유한 계층 출신이었던 이들은 ‘새로운 사회의 재조직’을 꿈꾸며 함께 책을 읽고 토론을 벌였다. 영국 복지국가 발달사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싱크탱크 ‘페이비언협회’(Fabian Society)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페이비언협회는 이후 진보적 비전과 의제를 선도적으로 제기하며 1900년 노동당 결성, 영국 복지국가 청사진의 모태 격인 1909년 <소수파 보고서> 발간,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 발간, 1945년 노동당 집권과 복지국가 건설 등 영국 역사의 주요 장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자본주의의 발흥 이후 영국이 극심했던 불평등을 극복하고 전후 복지국가를 세우도록 한 노동당의 비전 제시와 성취 뒤에는 페이비언주의란 사상이 있었고, 이는 ‘영국 싱크탱크의 원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조지 버나드 쇼 등이 주도하고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과 경제학자 존 케인스 등이 합류했던 이 협회는 창립 이래 거의 140년이 지난 오늘에도 각종 토론과 출판, 강연 등을 통해 새로운 생각과 대안을 빚어내는 데 힘쓰고 있다.

반대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보수당 마거릿 대처 총리의 신자유주의 노선, 이른바 대처리즘의 등장에는 자유시장 사상을 확산시키며 국가 개입주의와 ‘아이디어 전쟁’을 벌인 경제문제연구소(IEA), 아담스미스연구소(ASI), 정책연구센터(CPS)의 역할이 있었다. 1997년 신노동당(New labour) 기치를 내걸고 보수당 장기집권을 막고 나선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 노선과 정책에는 공공정책연구소(IPPR)와 데모스(Demos)가, 2010년 13년 만에 노동당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은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과 후임인 보리스 존슨 총리의 지향과 정책에는 정책교환소(PX)란 싱크탱크가 있었다.(김보영, <베버리지 복지국가에서 캐머런 정부까지>)

영국 역사에서 정치와 사상 그리고 정책의 역동적 궤적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이념적 지향이 어떻든 간에 한 사회가 새로운 사상과 정책을 잉태하고 큰 변화를 이루는 데는, 당대의 문제를 진단하고 선도적으로 대안과 해법을 제시하며 ‘여론의 기후’(Climate of opinion)를 바꾸는 사상의 토론장이자 정책의 산실인 싱크탱크의 역할이 매우 긴요하다는 사실이다.

정치의 목표는 본디 정책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의 삶의 질을 드높인다는 데 있지 않은가. 현실에서 이를 이루기 위해선 단지 공정한 선거와 민주주의적 제도만으로 부족하다. 좋은 정책이 생산되고 그 유통을 원활히 이뤄지는 정책생태계의 활발한 작동이 함께 이뤄져야 실질적으로 가능하다. 이를 일상적으로 실행하는 기초 정책인프라가 바로 “한 사회가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며 정책결정 과정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관”(박명준, <독일 싱크탱크 산책>)인 싱크탱크다.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국가나 기업뿐 아니라 시민사회에서도 싱크탱크를 설립해 운용한다. 싱크탱크는 특성상 정책 형성에서 결정 집행, 그리고 피드백에 이르기까지 정책결정 과정의 모든 구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정책생태계 속 가장 광범위한 역할을 지닌 행위자다. 이슈를 진단하고, 해당 이슈와 관련해 각계의 의견을 듣고 여론을 파악하는 한편, 해당 정책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와 자료를 수집한다. 이를 토대로 정책대안을 제시하거나 자문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제임스 맥켄 교수 보고서를 보면, 2020년 기준 세계 각국에서 싱크탱크 1만1175곳이 활동 중이다. 정책시장과 정책산업이 가장 활발하게 연계돼 돌아가는 미국(2203개)이 세계 1위 싱크탱크 보유국이었고, 중국(1413곳)과 인도(612곳), 영국(515곳)이 그 뒤를 이었다. 놀랍게도 5위는 대한민국이었다. 프랑스(275곳), 독일(266곳)보다도 많은 412개 싱크탱크가 활동 중이다. 비교적 짧은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역사를 고려하면, 한국 싱크탱크의 양적 성장은 괄목할만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1966년 박정희 군사정부가 거액을 출자해 설립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경제 분야 한국개발연구원(KDI), 사회정책 분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등이 한국의 대표적인 국책 싱크탱크로 손꼽힌다. 여기에 지방자치단체 산하 정책연구기관, 정당 소속 싱크탱크, 기업과 시민사회 등이 만든 민간 싱크탱크, 대학 부설 연구소 그리고 각종 비영리기구 연구기능까지 포함하면 우리나라 싱크탱크 수는 맥켄 교수의 집계보다 더 많은 500개 이상으로 추산된다. 싱크탱크가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의 중요한 정책생산자이자 정책행위자로서 다채로운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숫자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022년 11월21일 서울 동대문구 글로벌지식협력단지에서 열린 경제개발 5개년 계획 60주년 기념 간담회에서 역대 부총리 및 장관, 역대 한국개발연구원(KDI)원장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싱크탱크에 대한 문제제기와 제대로 된 역할을 주문하는 목소리는 수십년 째 반복된다. 한 전직 차관은 “현직에 있을 때, 국책연구기관 보고서는 특정 사안에 대한 현황을 파악하는 기초자료로 쓰거나 정부가 하려는 특정 정책의 정당화를 할 때 주로 활용했을 뿐”이라며 “정책결정 과정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싱크탱크들이 부처 공무원들이 미처 살피지 못하는 미래 이슈와 대안에 관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아이디어를 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한 정책연구자는 “기껏 보고서를 만들어줘도 (관료들은) 현안 대응에 급급할 뿐, 정책결정자들이 제대로 읽거나 활용하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하며 반박한다.

이 시리즈 칼럼 2회 때도 언급했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최대 난제인 저출생은 앞을 내다보지 못한 대표적 정책 실패 사례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출생아 수가 40년 전에 견줘 5분의 1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초보적 시계열 통계로도 추산 가능한 인구 문제를 정권이 방치해온 결과(황윤원 중원대 총장)”였는데, 그 많은 국가와 지자체, 민간 싱크탱크들은 무슨 역할을 했던가? 연구자 수 현저히 늘고 역량도 상당히 높아졌지만, 싱크탱크 활동에 관한 지적은 끊이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국책 연구기관은 여전히 정권 입맛에 맞추는 ‘마우스 탱크(말잔치 탱크)’나 ‘팅클 탱크(딸랑이 탱크)’라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민간부문은 싱크탱크 상당수는 영세한 규모가 큰 문제다. 빈약한 재원과 인력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며 몇년 버티다 주저앉기 일쑤다. 최근 꽤 규모 있는 몇몇 민간 싱크탱크가 출현했지만, 정책개발 능력이나 영향력 측면에서 위상은 아직 높지 않다.

2023년 세계는 불확실하며 낯설고 새롭고 모호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 특히 우리 사회는 각종 문제에 대한 해법은커녕 제대로 된 진단조차 버거운 상황이다. 공동체의 미래와 구성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싱크탱크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래서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 싱크탱크는 과연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당대의 문제를 진단하고 선도적으로 대안과 해법을 제시하는 사상의 토론장이자 정책의 산실’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정책 이슈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한겨레> 편집국에서 팀장과 부장, 논설위원, 부국장 등을 거쳤고,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임이사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영국편>, <복지의 문법>(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공저),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편저)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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