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 코앞] “고물가라지만 부럼과 묵나물 먹어야죠”⋯서울 경동시장 가보니

홍지상 2023. 1. 3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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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1인가구 기자, 정월대보름 앞두고 전통시장 찾아가보니
일요일 오후지만 모처럼 활기
다양한 견과류·잡곡류·나물류 즐비
토란대 등 일부 원산지 표기는 아쉬워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경동시장. 경동시장은 1960년 6월 개설돼 도라지·산나물 등 산야 채취 특산물과 밤·대추 등 견과류를 주로 취급한다. 1970년대는 양념류·제수용품(祭需用品)과 한약재 전문시장으로 입지를 굳혔다. 일요일 오후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사진=홍지상 기자

“추위가 풀려서 그런지 이번주는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정월대보름(2월5일)을 일주일 앞둔 1월29일 오후 4시,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은 나름의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양손에 엄마·아빠 손을 한쪽씩 잡은 아이가 재잘거렸고 믹스커피를 마시며 수다 떠는 시장 상인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시장 곳곳을 둘러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옥수수 노점을 발견했다. 허기가 급속히 몰려왔다. 인심 좋아 보이는 상인에게 한개당 1000원짜리 옥수수를 샀다. 한입 베어 물고 우물거리며 물었다.   “원래 사람들이 이렇게 많나요?” 

상인이 대답했다. “지금은 일요일 오후라 사람이 덜 모였어요. 제일 붐비는 시간대는 낮 12~1시 사이죠.”

서울 경동시장을 찾은 소비자들이 좋은 밤을 고르기 위해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사진=홍지상 기자

사람들이 많이 모일 시간이 아니라고 하지만 곳곳에서 호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먼저 마주친 건 견과류였다. 정월대보름을 코앞에 두고 땅콩·호두·은행 등 다양한 부럼이 진열돼 있었다. 마카다미아·아몬드·캐슈넛 등 수입 견과류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국산’이라는 글자에 빨간색 펜으로 여러번 동그라미를 그려 강조한 호두 옆에는 미국산 호두가 있었다. 국산 호두의 가격은 한되당 1만2000원으로 5000원인 외국산에 견줘 2.5배쯤 비쌌다. 

밤을 살펴보는 소비자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깐 밤이 들어 있는 소포장품 여럿을 비교하며 가장 나은 게 무엇인가 살펴보는 듯했다. 양손에 포장품을 각각 하나씩 들고 무게를 저울질하는가 하면 상처 난 밤이 있지 않나 손바닥 위에서 포장품을 놓고 이러저리 굴려보기도 했다.

손님이 진열대에 도로 놓고 간 밤 포장품을 다시 정돈하는 상인에게 질문했다.  “요즘 장사는 괜찮나요?”

그는 “장사라는 게 괜찮을 때도, 나쁠 때도 있는 것 아니겠느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고물가·고금리 등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정월대보름 특유의 여유와 넉넉함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

예로부터 정월대보름은 한해 풍요를 기원하는 날이다. 선조들은 대보름달의 밝은 빛이 질병·재앙 등 나쁜 기운을 몰아낸다고 여겼다. 새해 처음 뜨는 보름달을 맞이하면서 가족의 안녕과 한해 풍년을 바라는 뜻도 있었다. 특히 대보름날엔 이런 의미를 담아 부럼을 비롯한 귀밝이술·오곡밥·묵나물 등을 먹었다.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인 잡곡류가 이 시기 경동시장의 주인공으로 자리잡은 건 이 때문이다. 시장엔 쌀 외에 조·수수·팥·콩 등 여러 잡곡이 즐비했다. 

원산지 표지판을 보니 외국산이 눈에 띄게 많았다. 어디서 수입한 거냐고 묻자 “국산도 옆에 같이 있다”며 생뚱맞은 대답을 했다. 콩은 중국산이 대부분이었다.  

잡곡 가게 앞에서 이름과 가격을 오랜 시간 들여다보자 주인이 “필요한 물건 있으면 말하라”고 재촉했다. ‘내 지금은 비록 청년 1인가구지만 언젠가 내손으로 국산 잡곡으로 오곡밥을 지어먹어보리라’고 다짐하며 발길을 돌렸다.

묵나물 매대는 별천지였다. 고사리·호박고지·가지고지·시래기·취나물 등 종류만 족히 10개는 돼보였다. 묵나물은 묵혀뒀다가 먹는 나물이라 ‘묵은 나물’이라고도 불린다. 대보름날 삶아 무쳐 오곡밥과 함께 먹으면 다가오는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 

일부 소비자도 묵나물이 신기한 듯했다. 한 손님이 “이건 무슨 나물이고 어떻게 해먹어야 맛있느냐”고 물었다. 가게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말 맛있는 나물이라며 요리법을 좌르르 읊었다. 그러면서 사겠다는 말이 돌아오기도 전에 비닐봉투를 꺼내며 나물을 담으려는 시늉을 했다.

어깨 너머로 보니 고사리에는 말린 것이든 삶은 것이든 ‘국산’ 표기가 또렷하게 보였다. 반면 토란대에는 아무 단어가 없었다. 서로 열심히 흥정하기에 묻지 못하고 자리를 옮겼다. 또 다른 가게도 토란대에 아무 표기가 돼 있지 않았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토란대는 어디서 오나요?” 묻자 주인은 “토란대는 국산 안 나와요. 다른 데 가도 다 똑같을 건데”라고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마침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30일 내놓은 설명절 농식품 원산지 표시 위반 적발 건수를 보면 나물류의 원산지 표기 위반 사례가 적지 않아 뒷맛이 씁쓸했다. 2~19일 원산지 표시 일제 점검 기간 동안 474개 위반업체가 적발됐는데, 나물류·떡류 등 설 성수식품의 원산지 위반은 10.4%(56건)였다.

경동시장의 한 골목 풍경.

시장 전부가 북적거리기만 것은 아니었다. 입구를 조금 벗어나니 손님의 발길이 뜸한 골목도 꽤 있었다. 요즘 장사가 어떠냐고 묻는 말에는 “남들만큼 힘들다”는 다소 힘빠진 대답이 돌아왔다. 

정월대보름 우리 조상들은 큼지막한 달을 보며 쥐불놀이 등 여러 풍속으로 액운을 쫓고 새해의 풍요를 빌었다. 지난 한해는 전쟁·코로나19·금리인상 등 우리를 고달프게 하는 일들이 특히 많았다. 

올해에는 농산물 산지와 전통시장에 행운만 깃들기를 바라면서 한되당 3000원을 주고 산 땅콩을 대보름 부럼 삼아 와자작 깨물었다.

홍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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