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할때 꺼내쓰는 싱가포르 연금…내집마련도 '연끌'로

차창희 기자(charming91@mk.co.kr) 2023. 1. 3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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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중앙적립기금 CPF

◆ 연금개혁, 글로벌 연금강국 현장 ◆

싱가포르의 자산운용사에 근무하는 탄 씨(33)는 국민연금에 해당하는 '중앙적립기금(CPF)' 납입액을 활용해 최근 주택을 매입했다. 탄 씨는 "은행에서 대출만 받는다면 목돈 마련이 어려울 수 있는데 CPF 적립금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그는 "보통 결혼하면서 집을 사는데 CPF를 활용해 젊은 나이에도 충분히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CPF는 현재 55세 이하 기준 보험료율이 37%에 달한다. 한국 국민연금 보험료율(9%)의 4배를 넘는 수준이지만 정작 납부자의 반발은 크지 않다. 탄 씨 사례처럼 자신이 낸 CPF 적립금을 목돈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부동산 매매나 의료비 지출 등에서도 연금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보험료율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신뢰를 얻었다. 싱가포르의 자가 보유율이 90%에 달하는 이유는 연금을 활용한 주택 구매가 주요인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다. 정부가 토지를 대부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주거 안정을 노후 대비의 중요한 한 축으로 보고 연금 활용의 길을 터준 것도 주목할 만하다.

부분 적립식인 한국과 달리 싱가포르 연금체계는 완전 적립식으로 국민은 개개인의 적립액에 이자를 더한 액수를 연금으로 받는다. 젊은 세대가 고령 세대의 연금액을 일부 보조하는 한국과 같은 구조가 아니라 본인의 저축액에 따라 연금 수령액이 결정되는 것이다. 1984년에는 기여율이 50%까지 오르기도 했다. 국민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대거 낮춰졌다가 최근에는 평균수명 연장에 따른 노후 대비여력을 높이기 위해 재차 높아지는 추세다. CPF에 따르면 2023년 기준 55세 이하 국민의 연금 기여율은 37%다. 근로자가 월급의 20%를 내면 고용주가 17%를 보조해주는 구조다. 직장인 기준 월급으로 300만원을 받으면 60만원을 연금으로 납부한다는 얘기다. 기여율은 56~60세 29.5%, 61~65세 20.5%, 66~70세 15.5%, 71세 이상 12.5%로 연령대에 따라 달라진다.

기여율이 높고 기본적으로 개개인이 본인의 연금을 책임지는 구조다 보니 CPF 적립금은 장기적으로 꾸준히 증가세다. CPF에 따르면 2022년 3분기 기준 적립금은 5402억싱가포르달러(약 505조원)로 2006년(118조원) 대비 330% 늘었다.

싱가포르 연금 체계가 한국과 또 다른 점은 세부 계좌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CPF는 부동산 용도로 사용 가능한 일반계좌(OA)와 노후용 특별계좌(SA), 의료용 의료계좌(MA) 등으로 구분돼 있다. 매월 적립액은 분산돼 쌓이며 법률에 의거해 지급되는 이자 수익이 나온다. 2023년 현재 OA의 연간 이자율은 2.5%이고, SA는 4%에 달한다. 이민 13년 차인 헬스케어 스타트업 전문가 김영미 박사는 "맞벌이 등 자금에 여유가 있으면 OA 적립금을 SA로 옮겨 자산을 더 불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55세가 되면 현금처럼 빼서 쓸 수 있고 65세가 되면 적립금이 'CPF LIFE'로 전환돼 매월 연금으로 받을 수 있다.

CPF의 운용은 국부펀드 중 한곳인 싱가포르투자청(GIC)에 위탁해서 하고 있다. CPF는 제도 관리 및 운영에만 집중하는 방식이다. 한국에서도 알짜 부동산을 사들이며 큰 수익을 벌어 유명해진 GIC의 최근 20년 장기 수익률은 7%에 달한다. 그만큼 국민의 노후 자금이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GIC는 연금 적립금도 투자 재원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또 다른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 대비 보수적인 전략을 쓴다. 포트폴리오를 살펴보면 채권·현금 비중이 37%로 가장 높다. 안정성을 바탕으로 신흥시장 주식(16%), 선진시장 주식(14%)을 활용해 초과 수익률을 노리는 방식이다. 지역별로 보면 미국(37%), 일본(7%),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25%) 비중이 높은 편이다. GIC 측은 정확한 자금 규모를 공개하지 않지만 미국 리서치 회사 SWFI는 6900억달러(약 960조원)로 추산하고 있다.

GIC는 전 세계 주식, 채권에 집중하면서 최근에는 사모펀드(비상장주식), 부동산 등 대체투자도 활용해 알파 수익을 추구하는 모습이다. 특히 부동산 자산 비중은 전년도 8%에서 10%로 늘렸다. 사모펀드도 전년도 15%에서 17%로 증가했다. 권기정 NH투자증권 싱가포르 법인장은 "GIC가 투자하는 대체투자 관련 펀드는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성장률이 높다"며 "싱가포르 부동산 시장도 안정적이며 글로벌 자금도 계속 들어오고 있어 GIC는 대체투자 전문가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GIC는 부동산 시장에 적극적인 투자자로 변신했다. 2021년에만 110건의 거래에 345억달러를 쏟아부었다. 최근에는 일본 프린스 호텔 15개와 레저 부동산 16개를 매입했다.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SFC), 여의도 신한투자증권, 강남 강남파이낸스센터(GFC) 등 한국 오피스 시장에 투자하기도 했다.

한국의 국민연금이 싱가포르처럼 적립금 활용처를 다양화하기 위해선 다양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연기금의 관리·운용 방안은 국민연금법·시행령 등을 통해 규정돼 있는데 연금의 중도 인출은 법 개정 사안이기도 하다. 중도 인출이 가능해지면 기금 안정성과 소득대체율 유지를 위해 보험료율을 충분히 높여야 한다는 점도 변수다. 다만 전문가들은 청년 계층 위주로 정책의 유연성을 발휘한다면 오히려 지속 가능한 연금제도의 발판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김진유 경기대 교수는 "우리나라 연금은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사학연금 등으로 분리돼 있어 싱가포르 제도처럼 운용하기 위해선 운용 일원화 및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며 "연금 납부액 중 일부를 생애최초주택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면 기금 고갈 우려가 커지는 젊은 세대의 형평성을 제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차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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