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한겨레 2023. 1. 3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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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월간 풍경소리]

픽사베이

# 새벽에 오프라 윈프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일러주신다. “지구별이 제 궤도를 어김없이 지켜 빈틈없이 돌아가듯, 너의 일상 또한 영락없는 한님(신)의 작품이다. 구시렁거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아니라 할 것은 아니라 하고 ‘예’ 할 것은 ‘예’ 하여라. 내 사랑이 너를 통해서 흐를 수 있도록 나를 돕는 이것이 너의 모든 것아 되게 하여라.” 아멘.

# 살아서 죽는다는 게 본인 의지 없이는 불가능하겠지만 본인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는 나날이다. 그러니 더욱 어머니한테 매달릴 수밖에. 인생이란 더디게 진척되는 회임이라는 누구의 말이 삶의 순간마다 실감되기를 희망한다. 머리털까지 헤아리시는 어머니의 빈틈없는 보살핌이 아니면 여기 앉아 글을 쓰는, 암울한 세상에 있을 수 없는 ‘물건’이다. 오늘도 오프라 윈프리가 신통한 말로 위안을 준다. “사람들은 자기한테 있는 무엇이 최고 명품이라고 자랑한다. 그게 자신의 품위를 보장해준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명품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명품 인생이 되는 건 아니다.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우리가 더 가지려는 마음을 놓아버릴 때 자기 길을 자신이 제대로 가고 있는 지가 보인다는 사실이다.” 무엇을 더 가지려는 욕심을 놓아버리는 건 오히려 쉬운 일이다, 무엇이 어찌 되어야 한다는, 또는 어찌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놓아버리는 것에 견주면 말이다. 세계가 어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비우는 건 오히려 쉬운 일이다. 저 사람이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비우는 데 견주면 말이다.

# 마야 안젤루가 오프라 윈프리에게 해준 말이란다. “안 좋은 말에는 힘이 있어. 그것들이 당신 집, 당신 마음, 당신 인생을 차지하게 놔두면 벽과 가구 속으로 스며들고 마침내 당신 피부 속으로 스며들지. 안 좋은 말은 독이라고.” 오프라 윈프리는 이 말을 기억하고 안 좋은 말이나 생각이 들어올 수 없는 ‘쑥덕거림 없는 구역’(gossip-free zone)을 설정한다.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사람 말에 해치는 힘이 있는 만큼 치유하는 힘도 있음을 나는 믿는다.” 이 말은 한 걸음 나아간 정도가 아니다. 하나의 혁명이다. 무엇이 안 좋다는 말 천 번 하는 것보다 무엇이 좋다는 말 한 번 하는 것이 기적을 불러온다.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능히 없앤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 꿈속에서 “나는 파이의 파이다”라는 도렷한 음성을 듣고, 그래, 그러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람의 머리로 헤아려서는 알 수 없는 신의 현현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카톡’ 소리와 함께 멀리 뉴질랜드로부터 “심심해서 만든 아침의 빵 베이글 배달이요”라는 문자와 알록달록 빵들이 영상으로 날아온다. 허 참, 이러니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은총이요, 살아있음이 곧 축복이라는 아브라함 헤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잖은가. 물 샐 틈 없이 완벽한 어머니, 당신의 손길을 느끼며 하루를 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언젠가 수학 선생에게 ‘파이’를 설명해달라고 부탁해야겠다. 글쎄, 설명을 들으면 그게 뭔지 알 수 있을까? 먹는 파이가 파이인 건 어렴풋이 알겠다만. 그렇다, 사람이 뭘 알아도 어렴풋이 알 따름이다. ‘정확’은 철학과 수학의 언어다. 현실의 언어는 아니다. 스승님이 왜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조금은 알겠다. 오냐, 어디 오늘 하루라도 하는 데까지 해보자, 눈앞의 현실을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또는 그냥 두기! “하느님의 다른 이름이 현실”이라는 바이런 케이티의 말이 절묘하다. 그런 까닭에 날마다 코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거다. 저렇게 좁은 골목에서 꽃다운 아이들이 짓눌려 죽는 것을 누가 무슨 말로 해명한단 말인가? 입 다물고 눈물이나 글썽일 따름이다.

픽사베이

# ‘지금 여기’라는 말을 쓰긴 하지만 그 또한 그저 말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고, 그런 것이 어디 따로 있다는 착각에 속지 말 것. 눈앞의 보이는 현상에 눈길을 멈추지 말고 그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그분의 현존을 몸으로 느낄 것. 여기까지 쓰는 데 아랫집 영감이 갓김치가 맛있게 익었다며 한 통 가져다준다. 아니다, 아랫집 영감이 아니다. 그의 모습을 한 어머니 한님이시다. 기억하자, 겉으로 어떤 모습이든 사람마다 한님의 현시인 것을! 그것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그렇지 않아서가 아니라 네 눈이 네 생각으로 왜곡되어 있어서다. 잊지 마라, 부처 눈에는 부처 아닌 것이 없느니.

# 어제오늘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을 읽는다. “에라스무스는 그들(교황청 사람들)에게서도 (루터에게서 본 것과 같은) 자신의 잘못은 알려고 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맹목적인 광신을 마주한다.” 노골적인 폭력성을 감추지 않는 두 집단(로마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본인이 바라는 것은 오직 평화, 평화, 평화라고 말하는 유약한 선비 에라스무스의 곤경은 오늘도 비슷한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간혹 “나는 회색분자다”라고 주장하는 용감한 개인들이 출현하고 있긴 하지만.

# 잠과 깨어남 사이에서 떠오르는 생각. “그분과 동행하는 데는 세 단계 길이 있다. 먼저는 그분과의 동행을 진심으로 염원하는 것. 다음은 밤낮없이 곁에 계시는 그분을 깨어서 의식하는 것. 마지막은 네가 그분과 동행하는 게 아니라 그분이 너와 동행하시도록 너의 ‘나’를 온전히 비워 그분께 드리는 것. 이때 비로소, 성 바울로처럼, 내가 나로 사는 게 아니라 그분이 나로 사신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된다.” 자리에서 일어나 ‘달라이 라마가 만난 사람들’을 읽는데 울컥 눈물이 솟구치더니 한 말씀이 들린다. “괜찮은 생각이 나더라도 가만있어라. 그것을 이루려 하지 마라. 사람들한테 말하지도 마라. 너는 내가 내 일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그래서 너무나 소중한, 나의 손발이다. 나무에 가지가 없으면 꽃을 어떻게 피우고 열매는 어떻게 맺겠느냐?” 아멘. “그런즉 그녀는 자기 뜻을 닫아버리고 그리하여 당신한테서 오지 않는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고 오직 당신과 당신 안에 있는 것들만 사랑하며 당신께 순종하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입니다.”(시에나의 카타리나)

# 며칠 만에 시에나 카타리나 성인의 기도문을 읽는다.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저한테서 저를 잘라내는 것이지요.” 같은 말을 뒤집어 듣는다. “네가 누구를,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간에, 껴안아주는 것은 네가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모쪼록 오늘도 사람을, 그가 누구든 간에, 품어주고 사랑할 수 있기를! 아멘. 하지만 주인님, 저는 못합니다. 당신이 저로 그리하십시오. 이것이 저의 간곡한 청인 것을 당신이 아십니다.

글 아무개 관옥 이현주 목사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 사랑어린한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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