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 패러다임과 프레임 사이에서

정양범 매경비즈 기자(jung.oungbum@mkinternet.com) 2023. 1. 3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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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은 이기거나 지는 승패의 게임이다. 백(白) 돌을 잡은 대국자에게 덤 6집 반을 주니 계가에서 비기는 무승부는 없다. 바둑에서 나온 전문용어들이 전투같은 사회생활과 정치권에서 많이 쓰인다. 국면(局面) 전환, 초반전, 중반전, 묘수, 호구, 무리수, 자충수, 미생(未生)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의 수학 참고서 이름에서 알게 된 정석(定石) 등이다. 바둑 용어는 그 의미가 명확하고 비유와 은유의 효과가 확실하므로 일상의 용어로 된 것이니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학문적 전문 용어였지만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퍼지고 모든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면서, 그 의미가 확장된 추상적 단어가 있다. ‘패러다임(Paradigm)’이다.

원래 패러다임은 라틴어 계열 언어에서 동사 변형의 패턴을 의미하는 골치 아픈 문법 용어이다. 하버드대 과학사 교수였던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그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1962>에서 패러다임이란 단어를 가지고 과학의 발전단계를 설명하였다. 확장된 패러다임의 뜻은 한 시대 사람들의 보편적인 견해나 사고를 나타내는 인식의 체계나 이론적 틀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중세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믿어 왔던 천동설(天動說)을 패러다임의 대표적 예로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패러다임에 기반한 과학을 ‘정상 과학(Normal Science)’이라고 토마스 쿤은 정의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정상과학에 점차 의문이 생기고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없는 벽에 부딪히면 새로운 이론이나 주장이 나타나서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치한다. 이것이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이다. 천동설 패러다임에 대해 15세기 말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었고, 이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 케플러, 뉴톤 등이 지동설을 입증하니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다. 그 전환의 결과, 새로운 정상과학이 나타나고 과학의 진보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그는 ‘과학자의 패러다임’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가 타임(Time)지에 의해 “2차 대전 후 가장 영향력 있는 100권의 도서” 중 하나로 선정된 후, 그도 인정한 바와 같이, ‘패러다임’이란 단어는 통제불능의 상태로 되어 과학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 경영, 인문 등 모든 분야에서 현상과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차용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비록 패러다임은 과학자들의 작은 틀로써 시작했지만, 이제는 한 시대의 사고나 이론을 한정시키는 큰 틀로서 성장한 것이다. 반면 시대에 상관없이 개인의 생각을 한정시키는 틀은 패러다임이라 하지 않고 ‘프레임(Frame)’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술병을 보고서 “술이 반 병이나 남았네!”라고 말하는 사람과, “술이 반 병 밖에 없네”라 말하는 사람은 긍정과 부정 프레임의 차이이고, 그 결과 각각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똑같은 행동일지라도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보는 지에 따라 평가도 달라진다. 예들 들어, 기도 중에 담배 피우는 사람은 비난 받겠지만, 담배 피우는 중에 기도하는 사람은 용납될 것이다. 어떤 상황이나 대상을 인식하는 데 기존의 프레임을 사용하는 것은 생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다.

패러다임과 프레임, 양자의 차이를 설명한다면, 특정 시기 사람들의 대규모 인식의 틀로서 이론, 법칙 또는 사회적 공리(公理)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패러다임이다. 반면, 프레임은 개인이 일상 생활 속에서 갖게 된 소규모 인식의 틀로서 성향과 성격을 나타내고 개별 행동의 기저를 이룬다. 공통점으로는, 한번 자리 잡은 것은 그 관성 때문에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바꿀 수 없다는 경직성이다. 토마스 쿤이 의도하거나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공통적 프레임이 모이면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도 있다. 개인의 프레임과 사회의 패러다임은 현대의 기업 활동에 영향을 주는 아주 중요한 경영환경이다.

경영학은 기업이라는 생물의 활동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경영학은 ‘도구의 학문’이다. 또 경영학은 경제학, 사회학, 철학, 심리학, 역사학, 법학 등 인문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여러 현상, 이론 그리고 법칙을 차용해서 발전시키는 학문이므로 ‘흡수학문’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도 있다. 예를 들어 경영학에서 기업의 바람직한 의사결정은 철학의 논리적이고 창의적이며 윤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패러다임에 부합한 것이어야 한다.

기업 경영에서 피할 수 없는 사회적 패러다임을 ‘경영 패러다임’이라고 흔히 표현한다. 초기 자본주의라는 경영 패러다임 속에서 기업의 존재 의의와 목표는 주주 이익의 최대화를 위한 ‘이윤추구’였다. 이때 경영자는 단순하게 전통적 프레임에 따라 주주중심 경영(Shareholder Management)을 하면 됐다. 그러나 지금은 지구 온난화가 촉발한 지속가능경영과 ESG경영을 해야 한다. 거기에 최근에는 기업의 이념과 비젼을 소비자, 종업원, Supply Chain, 지역사회로까지 확대하는 문화경영, 가치경영, 신뢰경영 등 다양한 경영 패러다임이 추가되고 있는 가운데, 그들의 이익까지도 배려하라는 ‘공유가치창출(Creating Shared Value) 경영’이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으로 등장하였다.

이렇듯 중첩적으로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여러 경영 패러다임은 경영자에게 새로운 경영환경이지만 압력으로서 작용한다. 즉, 기존의 ‘주주중심경영’ 프레임에서 벗어나 경영 활동과 관련된 이해관계자들의 이익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이해관계자중심경영(Stakeholder Management)’으로 프레임을 바꾸라는 압력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시대 상황에 따른 경영 패러다임의 변화는 경영자 뿐만 아니라 노조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프레임 변화도 요구하고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아직도 경영자 일방의 변화만 요구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노조는 기업을 투쟁의 대상자로 생각하는 기존의 프레임을 빨리 버려야 한다. 기업에게 노조가 배려해야 할 상생의 이해관계자 이듯이, 노조에게도 기업은 동반자적 이해관계자라는 프레임의 확산이 절실하다. 그 결과 바둑처럼 승자와 패자로만 양분하는 승패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비기거나 승승(勝勝;Win-Win)해야 한다는 패러다임의 정착으로 ‘정상 경영(Normal Management)’이 확고 해져야 한다.

[진의환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니스트/ 현) 소프트랜더스 고문/ 서울대학교 산학협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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