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칼럼] 굿바이, 아던

김영희 2023. 1. 30. 13: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영희 칼럼]그는 “뉴질랜드인들이 친절하면서도 강하고, 공감하면서도 단호하고, 낙관적이면서도 집중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떠난다. 당신은 ‘언제 떠날지 아는’ 자신만의 유형의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나의 욕망이 나다움을 부정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희생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많은 이들이 돌아보지 않았을까. 이런 ‘영감’을 주는 정치인의 존재가 몹시 그리울 것 같다.
뉴질랜드 최악의 테러로 기록된 2019년 크라이스트처치 이슬람사원 극우테러 사건 당시 저신다 아던 총리가 웰링턴의 한 이슬람사원을 방문해 한 여성을 안고 위로하던 모습. 당시 두바이의 세계 최고층 빌딩인 부르즈칼리파에는 ‘평화’를 뜻하는 영어·아랍어와 함께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는 아던의 사진이 투영됐다. 연합뉴스

김영희 | 논설위원실장

언제나 남성중심 구조의 사회가 달라지려면 여성들 또한 ‘야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여성들이 기존과 다른 리더십을 보여주길 바라는 만큼, 떠날 때도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종종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게 가능한 일일까 의구심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난 25일자로 공식사임한 저신다 아던 전 뉴질랜드 총리는 보여줬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37살이던 2017년 당시 세계 최연소 총리가 됐고, ‘저신다 마니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중적 인기와 진보적 지도자로 세계에서 명성을 누렸던 그가 사임을 발표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외신에선 여러 기사를 쏟아냈다. 현대 정치인들에게 자주 찾아오는 번아웃은 그중 단골 주제다. 에스엔에스 시대에 정치인들은 24시간 노출된다. 아던은 특히 최근 심각한 수위의 비방과 협박에 시달렸다고 한다. 지난해초 뉴질랜드 의사당 잔디까지 점거했던 백신 반대 시위대, 총기규제 반대 세력 등이 중심이다. 아던이 탄 차량을 좇으며 외설적 말을 퍼붓거나 ‘나찌’라 부른 경우도 있었다. 뉴질랜드 경찰은 지난해 아던을 향한 협박 등이 3년간 3배 늘었다고 밝혔다. 높은 직위의 여성들은 같은 직위 남성보다 번아웃에 시달리는 비율이 12%p 더 높다는 등의 통계를 인용하며 ‘여성이 부딪히는 한계’를 지적하는 분석도 이어졌다.

모두 일리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의 사임엔 정치인, 여성, 그리고 보통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좀더 다른 강력한 울림이 있다.

아던은 총리라는 특권적 지위에 자기가 적임자가 아니라고 밝혔다. “난 총리직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할 연료통의 여분이 없다는 것도 안다. 여러 추측들을 하겠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일부에선 10월 총선을 앞두고 소속당의 패배가 예정돼 있는 게 배경이라고도 본다. 실제 서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코로나 방역에도 불구하고, 아동빈곤 절반 감소나 탄소중립 실현 같은 공약이행은 멀어졌고 심각한 주택문제, 고물가 등으로 노동당은 2020년 총선 압승과 달리 야당에 지지율이 뒤지고 있다. 하지만 그 격차는 지난달 기준 5%p 정도인데다 총리에 바람직한 인물을 묻는 질문엔 여전히 그가 1위였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정치가 양극화되며 정치인이 ‘정당의 전사’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그는 정치인이 ‘시민의 공복’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강력하게 환기시켰다.

아던은 일하는 여성들을 둘러싼 논쟁의 지형 역시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렸다. 그는 사임회견에서 5살된 딸의 이름을 부르며 ‘학교 입학 때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고 동거인에겐 ‘이제 결혼하자’고 말했다. <비비시>(BBC)는 이와 관련해 ‘여성이 모든 걸 가질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가 ‘여성혐오적’이라는 독자들 항의에 제목을 수정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제시카 그로스는 “‘모든 것을 갖는다’는 것이 야망과 성공, 경제적 보상을 위해 우리 삶 전체나 건강을 희생해야 함을 뜻할 순 없다. 페미니즘 등을 위해 자신이나 가족에게 적합하지 않은데도 직업을 떠날 수 없다는 의미 역시 아니다”라고 썼다. 공감한다. 성공한 여성이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가지 않고 ‘노’라고 말할 때 나오는 ‘무책임하다’ ‘여성은 어쩔 수 없다’ 같은 시선은 사라져야 한다. 남성들이라면 절대 하지 않는 말, “내가 잘못하면 여성들에게 폐가 될까 봐” 같은 인식도 이젠 넘어서야 한다.

저신다 아던 전 뉴질랜드 총리가 지난 24일 총리로서 마지막 공식석상에서 발언하고 있다. 2018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2세를 방문할 당시 원주민인 마우리족 의상을 입었던 그는 북섬 라타나의 마오리 족 정착촌에서 선각자 라타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이날에도 마우리족 망토를 걸쳤다. 라타나/로이터 연합뉴스

아던의 리더십은 ‘공감과 친절’로 요약돼왔다. 하지만 그것은 약하고 우유부단한 게 아니었다. 2019년 3월 무슬림 51명이 희생된 크라이스트처치 이슬람 사원 극우테러 때 히잡을 쓰고 희생자 유족들을 끌어안으며 흘린 그의 눈물은 ‘진짜’였다. 유명세를 떨치고 싶어 테러현장을 영상 중계한 범인의 ‘이름’을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1주일 만에 강력한 총기규제안을 내놨다. 2020년 3월 국경 차단 등 51일간의 초강경 봉쇄정책을 전격 시행할 당시 그가 국민들에게 보낸 메시지 “강하라 그리고 친절하라”는 팬데믹 시기 캐치프레이즈가 됐다. 경제적 타격으로 인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한 이 봉쇄로 뉴질랜드인 8만명의 희생을 줄였다는 분석이 나왔다.

뉴질랜드는 19세기 원주민 몫 의원석을 배분하고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도입하는 등 ‘사회적 실험실’이라 불렸지만, 국제정치의 중심이거나 주목의 대상은 아니었다. 아던이라는 지도자를 가지면서 뉴질랜드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아던의 집권이 모든 면에서 성공적이란 뜻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민주주의가 트럼프 집권과 의사당 점거로 위기에 봉착하고 각국에서 20세기형 스트롱맨이 다시 등장한 시대, 그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힘이 센 건 공감과 친절임을 보여줬다.

그는 “뉴질랜드인들이 친절하면서도 강하고, 공감하면서도 단호하고, 낙관적이면서도 집중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떠난다. 당신은 ‘언제 떠날지 아는’ 자신만의 유형의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나의 욕망이 나다움을 부정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희생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많은 이들이 돌아보게 되지 않았을까. 이런 ‘영감’을 주는 정치인의 존재가 몹시 그리울 것 같다. 굿바이, 아던.

dora@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