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여 안녕] 설산 정상에서 만난 천상…이 눈꽃 지면 마침내 봄

지유리 2023. 1. 30.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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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여 안녕] 강원 태백산 오르기
설화 만발한 주목군락지…뒤돌면 수묵화 풍경
1567m 정상엔 수정처럼 빛나는 얼음꽃 향연
세찬 바람 ‘연주’ 따라 영롱한 종소리 울려퍼져
지상세계 아닌듯 신비로운 풍경에 탄성·탄복
유일사 ~ 장군봉·천제단 ~ 당골광장 코스 추천
등산로 넓고 암벽 적어 초보자·가족여행에 제격
태백산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객이 상고대와 고목으로 변한 주목을 바라보고 있다. 태백=현진 기자

모든 것은 제 모습일 때 가장 아름답다. 계절도 마찬가지다. 겨울은 추워야 하고 그 추위가 혹독할수록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 겨울을 오감으로 만끽하러 강원 태백산으로 향했다.

예부터 민족의 영산으로 불린 태백산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백두대간 중앙부에 솟은 산이다. 우리네 젖줄인 한강과 낙동강이 발원한 곳이기도 하다. 언제 올라도 좋은 산이지만 영험한 기운을 느끼려면 겨울이 제격이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에 있거니와 정상 부근에 주목 군락지가 있어 겨울 풍광이 신비롭기로 유명하다. 눈꽃을 감상하기에 좋은 설산 가운데선 등반 난이도가 평이한 축에 속하는 것도 장점이다. 태백시 평균 해발고도는 902m로 최고봉인 장군봉(해발 1567m)까지 실제 등반 거리가 길지 않아 어린 자녀를 둔 가족 단위가 함께하기에 알맞다.

평소 체력이 좋은 편이라도 설산 등산이 처음이라면 마냥 쉽지는 않을 터. 어떤 코스를 택해야 할까. 이영철 태백시산악연맹 회장은 유일사 주차장에서 시작해 장군봉·천제단을 찍고 당골광장으로 내려오는 길을 추천했다. 등산로가 넓고 암벽이 적어 남녀노소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단다. 정상을 앞둔 능선에선 바람이 심하게 부니 방한에 신경 쓰라는 팁도 일러줬다.

조언에 따라 유일사 등산로 입구에 섰다. 눈으로 뒤덮인 탐방로는 스키장 슬로프처럼 매끈하다. 길 양옆으로 줄지어 선 나무마다 최근 내린 숫눈이 그대로 쌓였고 하늘엔 구름이 잔뜩 드리웠다. 땅과 하늘, 시야가 온통 흰색이다. 귀에 닿는 소리라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뿐이다. 말 그대로 설국(雪國)에 들어선 듯하다. 같은 하늘에서 내렸을 텐데 태백산에 쌓인 눈은 서울 것과 때깔부터 다르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양새가 마치 수정구슬 같다. 그 모습에 서너걸음에 한번씩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느라 발보다 손이 바쁘다.

등산객에게 눈 덮인 산속은 이른 봄이다. 오르막을 걸으면 어느새 등줄기에 땀이 맺히고 털모자를 쓴 머리는 후끈후끈하다. 나무가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새하얀 눈밭이 햇빛을 반사해 춥기는커녕 포근하다. 꾸역꾸역 껴입은 패딩점퍼를 벗고 털모자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옷차림이 가벼워지자 움직임이 한결 가뿐하다.

태백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유일사.

쉬엄쉬엄 두시간쯤 오르면 유일사와 천제단 갈림길이 나온다. 이제 정상까지 30분 정도 남았다. 마지막 고비인 걸까.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 얼굴을 휘감는 바람이 제법 차다. 숨도 살짝 가빠온다. 그래도 힘을 내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잠깐 고생을 참으면 보상으로 눈앞에 절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드디어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 군락지다. 눈옷을 입은 나무들 사이에 본연의 붉은색을 드러낸 주목이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동화 속에 들어온 듯 착각에 빠질 만한 모습이다.

주목 군락지를 넋을 놓고 바라보다 뒤돌아서면 입이 열리고 모르는 새 탄성이 터져 나온다. 굽이굽이 똬리를 틀고 주위를 휘감은 산세가 한폭의 수묵화다. 산 너머 동해까지 한눈에 담으면 새삼 우리 땅의 아름다움에 탄복하게 된다.

여태 올라오는 길이 설국이었다면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얼음 왕국이다. 큰 나무 대신 허리춤까지 오는 철쭉밭이 이어지는데 이맘때는 분홍꽃 말고 투명 얼음꽃이 만발한다. 여기에선 거센 바람이 반갑다. 바람에 흔들린 얼음꽃이 서로 부딪치며 영롱한 종소리를 낸다. 가락에 맞춰 얼음꽃은 은빛으로 빛난다.

너른 평지인 장군봉에는 돌로 쌓은 제단인 장군단과 하단이, 5분 거리 영봉(해발 1561m)엔 천왕단이 있다. 총 3기 제단을 통틀어 천제단이라고 한다. 고조선시대에 축조돼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장소다. 삼국시대에도 활발히 쓰였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군이 이곳에서 독립을 염원했다고 한다. 몇몇 등산객이 장군단 위에 간단히 주전부리를 올려두고 기도한다. 오랜 세월 많은 이가 남긴 크고 작은 바람들이 태백산을 신령스럽게 한 것은 아닐까.

당골광장을 향해 내려가는 길 역시 무난하다. 다만 눈 쌓인 내리막은 더욱 미끄러워 낙상 사고가 빈번하니 주의해야 한다. 태백산 눈꽃 등반은 날씨가 받쳐준다면 2월 중순까지 가능하다. 마침내 봄이 와 눈이 녹은 뒤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눈꽃이 진 자리엔 연둣빛 새순이 돋아날 테니. 

태백=지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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