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댐의 빛과 그림자] 4. 소양강댐 건설 비화

오세현 2023. 1. 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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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건설부 이권 얽힌 ‘123m’ 인제지역 운명 뒤집어
한전 높이 86m 저댐 추진
건설부 산하 조사단 145m 추천
박정희 전 대통령 122m 결단
“145m 확정시 인제 전체 수몰”
정일권 전 총리 표밭 인제 지켜
123m, 콘크리트 방식 불가피
현대건설 ‘록필’ 사력식 강조
자재 이동 등 경비 절감 주장
북 폭격 등 고려 사력댐 확정
‘동양 최대 사력댐’ 지위 획득

동양 최대 규모의 사력댐을 짓는 일은 시작부터 수정과 검토를 반복하는 작업이었다. 정부는 댐 목적부터 건설 방식, 재원조달 방법, 규모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쳐야 했다. 한일양국의 관계, 정부 각 부처의 입장, 결국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까지. 소양강댐 건설은 1950년~1960년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 소양강댐 공사 현장. 산을 가로질러 공사 자재 운반이 한창이다. 사진제공=K-water

■ 댐 높이 123m의 의미

소양강댐 건설은 1950년쯤부터 검토가 시작됐다. 당시 정부는 수력발전 단일목적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분단 이후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0년이 되면서 우리나라 산업화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서울을 포함한 한강 하류 지역의 용수 수요가 급증하면서 1960년대 중반, 4대강 유역 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됐다. 이 과정에서 건설부 주도로 치수와 이수를 겸한 다목적 개발방식으로 소양강댐을 짓기로 했다.

소양강댐 건설 이면에는 한전과 건설부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있었다. 한전은 비용이 적게 드는 발전 전용 댐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건설부는 홍수 조절이 가능한 다목적댐을 건설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들이 맞선 이유는 댐 용도에 따라 소유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발전 전용으로 댐이 만들어지면 한전이 소유권을 갖지만 다목적댐으로 건설되면 소유권은 건설부가 쥐게 된다.

한전은 당시 전력단일목적에 유리한 담수량 10억t 규모의 저(低)댐을 계획하고 있었다. 정부가 일본과 차관계약을 서둘러야 할 상황을 이용, 1967년 4월 일본과의 차관계약을 체결한 데 이어 저댐건설을 기정사실화 하고 댐 전체공사를 한전에서 담당하겠다고 발표했다. 건설부는 즉각 반발했다. 1967년 5월 박정희 전 대통령 주재로 열린 회의에서 장기영 전 부총리는 “소양강댐은 한전으로 하여금 착공시켰다”고 공식 보고했다. 부처간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건설주체가 발표된 것이다. 이에 대해 건설부는 현장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백년대계를 위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북한강 수계를 조절할 수 있는 대용량 저수능력을 가진 댐지점을 헛되이 줄여 없애고 말 수 없다”고 항변했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재검토를 지시했다.

▲ 소양강댐 공사 현장. 소양강댐 주변에 있던 모래와 자갈 등은 댐 공사 핵심 자재로 쓰였다. 사진제공=K-water

한전은 높이 86m(10억t) 규모로 시공하려 했으나 미국의 기술지원을 받고 있던 건설부 산하 한강유역조사단은 높이 145m(45억t)를 추천했다. 건설부는 차선으로 높이 122m(29억t)를 택했다. 당시 정일권 전 총리가 각 부처 간 조정을 시도했으나 입장은 좁혀지지 않았다. 정일권 전 총리 입장에서도 결정은 쉽지 않았다. 145m로 결정되면 인제 전체가 수몰되기 때문이다. 인제는 정 전 총리의 표밭이었다. 정 전 총리는 소양강댐 건설이 마무리되던 1973년 2월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결국 결정은 박정희 전 대통령 몫이었다. 박 전 대통령에게는 3가지 안(높이 145m, 122m, 86m)이 제안됐다. 건설부는 정 전 총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박 전 대통령과의 직접면담을 시도, 승낙을 얻어냈다. 박 전 대통령은 정 전 총리가 귀국한 직후 “소양강댐은 다목적 중댐 규모로 건설하라”고 정식 지시공문을 발송, 장기간에 걸친 부처간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춘천학연구소가 펴낸 춘천인증언록 ‘댐과 춘천’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책에 따르면 “건설부 차관은 직접 박정희 대통령께 3가지 안을 가지고 브리핑을 하자, 122m로 하라는 안을 받아 냈다. 여유고 1m를 추가해 댐 높이가 123m가 된 것이다. 만일 145m로 됐다면 인제 시가지는 다른 곳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론할 수가 있다”고 했다. 댐은 이렇게 지역의 운명을 바꿨다.

▲ 소양강댐 제1호 발전기가 설치됐다. 사진제공=K-water

■ 동양 최대 ‘사력댐’에 얽힌 사연

소양강댐은 댐 목적 뿐만 아니라 건립방법을 두고도 이견이 오갔다. 정부는 1962년 11월 7일 일본공영 주식회사와 소양강댐 시설 설계에 대한 용역을 체결했다. 설계를 맡은 일본공영은 암석을 쌓아 올리고 흙을 바르고 물을 막는 방식인 ‘록필’댐으로 소양강댐을 건설하기로 했다. 공사비가 저렴하고 관리가 편한 데다 외화가 많이 필요한 시멘트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댐 높이가 123m 중댐 규모로 정해지면서 공사 방식은 다시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바뀐다. 86m인 저댐일 경우 록필 방식이 적합하지만 높이가 올라간 만큼 콘크리트 중력 시공방식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8년 소양강댐 건설을 맡은 현대건설은 콘크리트 중력댐을 록필 사력식으로 변경하면 공사비를 34억원 줄일 수 있고 공사기간도 단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록필 사력식 공사에 투입될 자갈과 돌, 모래는 소양강댐 근처에 널려 있으니 자재 이동에 따른 경비도 절약할 수 있다고 봤다.

▲ 1973년 10월 15일 열린 소양강댐 준공기념식. 사진제공=K-water

소양강댐 건립방법은 안보 문제와도 직결됐다. 현대건설은 건립방법을 변경하는 정부 브리핑에 북한의 폭격을 받을 경우 콘크리트댐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내용을 담았다. 콘크리트댐은 폭격을 받으면 순식간에 무너져 쏟아지는 물로 서울이 잠길 위험이 있지만 사력댐은 주저앉는 정도이기 때문에 물이 한꺼번에 쏟아질 염려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북한을 코앞에 둔 소양강댐의 지리적 요건을 감안, 정부는 이 부분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 소양강댐은 동양 최대 규모의 ‘사력댐’이라는 지위를 얻게 됐다.

소양강댐 건립사업은 건설 당시 정부 예산의 6분의 1 정도인 321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대역사다. 재원 중 37%는 대일청구권자금을 도입해 추진됐다. 콘크리트댐 건설을 맡아 적자 폭을 어떻게 줄일지 고민하던 현대건설은 사력댐으로 변경하면서 오히려 흑자를 냈다. 한국의 기술력을 인정받아 말레이시아 등 댐 공사를 수주하기도 했다. 오세현·사진제공=K-w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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