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라디오

조미형 소설가 2023. 1. 3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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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형 소설가

라디오는 소리로 피어나는 꽃과도 같습니다. 라벤더리시안 꽃을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로 DJ가 함께하기를 청하네요. 출근길에 마주친 사람들의 옷이 가벼워졌다며, 봄이 오고 있다고 전합니다.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매화꽃이 피었을까요? 묻네요. 조수미가 부르는 ‘Songs My Mother Taught Me’를 들려줍니다.

청취자들이 매화꽃 소식을 라디오 앱을 통해 실시간 알려옵니다. 거제도에는 가지마다 꽃망울이 맺혔는데 은은한 향을 맡을 수 있다고 합니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매화꽃 향기를 음미합니다.

문득 예전에 살던 집 앞 공원 구석에서 자라던 매화나무 한 그루가 생각났어요. 볼품없이 앙상하게 마른 나무였습니다. 어느 날, 추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꽃망울이 올라오더니 꽃이 피었습니다. 이른 새벽 창문을 열면 은은한 향이 났어요. 약간 톡 쏘는 알싸하면서 달콤한 향기였지요. 가늘고 여린 나무는 꽃을 피우느라 힘들었는지 꽃이 지고 또 죽은 듯 웅크려 있다가 잎을 틔웠습니다. 공원을 오가는 사람들이 구석진 매화나무 아래 웅크려 앉아 급한 볼일을 보기도 했어요. 유치원 아이부터 교복을 입은 아이와 옷을 잘 차려입은 어르신도 매화나무를 찾았습니다. 묘하게도 들고양이들도 매화나무 아래 흙을 파고 볼일을 봤습니다.

봄비가 내리고 물방울처럼 생긴 초록 열매가 볼록해졌습니다. 매실을 발견한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 손끝으로 열매를 톡 건드리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매실이 커질수록 나무 주변을 좀 더 오래 머물다 아쉬운 표정으로 떠나기를 반복했습니다. 하루는 해가 질 무렵 머리가 희끗희끗한 여자가 매화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자신이 봄부터 봐놓았던 매실이 사라졌다며, 누가 따갔느냐고 험한 말을 쏟아내더니 갑자기 매실나무 가지를 뚝 분질렀어요. 그 후 몇몇 사람이 비슷한 행동을 했습니다. 잎을 뜯고, 가지를 분지르고 나무를 발로 찼습니다. 무더위가 시작되는 6월 중순 유치원 원복을 입은 아이가 나무 아래에서 엄마를 불렀습니다. 노란 열매가 있다며 먹어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만 볼 수 있는 가지에 노랗게 익은 매실 한 개가 잎사귀 뒤에 있었어요.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귀에 무슨 말인가 속삭이고 손을 잡고 떠났습니다. 문득 그때 아이의 엄마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집니다.

영화 음악 두 곡을 이어서 들려주네요. 꽃잎을 스치는 바람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DJ가 봄꽃 소식을 전합니다. 제주도에 유채꽃이 피었다고 하네요. 바람이 불면 노란 물결이 일렁거려 눈이 부신다고 합니다. 일상을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꽃은 싱그럽고, 유난히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사연을 듣는 동안 머릿속에는 강렬한 원색으로 눈을 사로잡은 앙리 마티스의 ‘붉은 물고기와 고양이’가 떠오르네요. 노란 고양이 한 마리가 물고기 세 마리가 담긴 어항 속에 앞발을 넣고 있는 그림입니다. 소리로 피어나는 라디오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만큼이나 다채로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습니다.

DJ는 청취자에게 자신만의 봄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하네요. 나만의 봄 설렘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꽃이 핀 들녘으로 산책을 가볼까 싶다가 불쑥 봄나물을 사러 시장에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해 질 무렵 라디오는 따뜻한 위로를 전합니다. DJ가 전하는 낮고 고요하지만 푸근한 음성으로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습니다’는 말에 코끝이 찡하네요. 저녁이 전하는 음악을 듣는 순간 울컥합니다. 고기잡이하는 어부처럼 짠 내 나는 하루를 보내지 않았는데, 발바닥이 따가울 정도로 뛰어다니는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왜 울컥할까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장국영의 노래 ‘We’re All Alone’이 거실을 가득 메웁니다.


라디오는 땀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려주기도 하고, 간질거리는 설렘을 전달하다가 이제는 그리움이 되어버린 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내일은 라디오가 또 어떤 색깔의 꽃으로 피어날지 자못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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