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우리 모두 부조리 연극의 배우들이다

박돈규 문화부 차장 2023. 1. 30.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김혜자 책이 베스트셀러 1위
그 고백이 위로와 희망을 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닥치지만
나쁜 경험도 이겨내면 금은보화

세상이 김혜자를 읽고 있다. 이 배우가 쓴 책 ‘생에 감사해’가 설 연휴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올랐다. 한 달 만에 5만부가 판매되었다. 이 책에서 “우리 모두 조금씩은 부조리 연극의 배우들입니다”라는 문장이 눈길을 붙잡았다. “단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절망감과 우울증 속에서도 스스로 힘을 내어 살아가는 것입니다”라고 김혜자는 썼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노희경 작가가 배우 김혜자에게 "맨날 엄마를 소녀같이 연기하면 누가 선생님을 또 쓰겠냐"며 쓴소리를 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미쳤나? 생각했습니다. 기가 막히고 자존심이 상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떤 진실이 들어 있었어요. 마음을 독하게 먹고 말투를 '칼칼하게' 바꿨습니다." /이태경 기자

부조리 연극이라는 장르가 있다. 세상은 왜 이토록 부조리한가, 라고 말할 때 그 부조리다. 기가 막혀 웃음밖에 안 나오는 상황이 무대에 펼쳐진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대표적이다. 두 광대는 아주 오랫동안 고도를 기다려왔다. 고도는 오늘도 나타나지 않고 그들은 “가자” “안 돼”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를 반복한다. 자기 삶조차 통제할 수 없는 무력한 현대인을 그린 것이다.

김혜자 얼굴에는 한국 여자가 살면서 겪는 소용돌이가 다 담겨 있다. 70대는 드라마 ‘전원일기’로, 60대는 조미료 광고 “그래, 이 맛이야!”로, 50대는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로, 40대는 영화 ‘마더’로, 30대는 드라마 ‘눈이 부시게’로, 20대는 편의점 ‘혜자 도시락’으로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중력처럼 어디에나 있는 여자. 모든 세대를 잡아당긴 국민 배우지만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김혜자는 고백한다. 나의 전부가 벗겨져 버린 것 같아 사람들 앞에 나서기 두려운 적이 있었다고. 절망하고 죽음을 생각한 때가 있었다고. 반짝이는 별의 반대쪽은 어둡듯이, 김혜자는 집에서 빵점이었다. 일찍이 남편과 사별했고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힘을 내어 살아간다.

배우 김혜자 /사진작가 김중만

최근에 만난 김혜자는 배역 속 여자들을 연기하면서 조금씩 성장했고 인생을 배웠다고 했다. “나는요, 보통 사람도 알게 모르게 자기 인생을 연기한다고 생각해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대로 미래가 결정되잖아요. 형편없는 생각이나 하고 형편없이 하루를 보낸다면 그저 그런 인간이 되겠지요. 따라서 우리 모두가 멋진 대본을 써야 하고 멋진 연기자가 되어야 해요. 그것은 자신에게 달린 일이고요.”

인생의 속박에 고통받는 역이라 해도 그 속에 바늘귀만 한 희망이 보이는가. 그것이 김혜자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었다. 평소에는 흐릿한 불씨처럼 존재하다가도 배역을 맡으면 화산처럼 폭발했다. 그래야 남편과 아이들에게 떳떳해질 수 있었다. 그녀는 삶의 시궁창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을 연기했다. 가슴에 불씨가 있어도 꺼뜨리지 않고 타오르게 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린 일이다. 나쁜 경험도 이겨내면 금은보화로 바뀐다고 김혜자는 말한다.

김혜자의 쓴 문장 /교보문고

매니저도 소속사도 없이 살아온 이 배우는 “인생의 매니저인 신이 나와 함께하고 계신다”며 웃었다. 감당할 수 있는 짐만 실어준다고 믿는 낙타처럼, ‘무겁다’ ‘힘들다’ 불평하지 않는다. 쓸쓸하고 불안할 땐 누군가 내 작품을 구상하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그 감정을 밀어낸다고 했다. 인생의 길을 늘 선택할 순 없다. 하지만 ‘걷는 방식’은 언제나 고를 수 있다.

김혜자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대배우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라는 위로와 ‘내게도 지켜야 할 불씨가 있구나’라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기약도 없는데 기를 쓰고 고도를 기다리는 광대들을 보며 깔깔거리다 퍼뜩 이런 생각이 든다. 저 광대들이 내 모습 아닌가? 김혜자 말마따나 우리 모두 조금씩은 부조리 연극의 배우들이다. 기가 막히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닥치지만 불씨를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

배우 김혜자가 쓴 책 '생에 감사해'가 최근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