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1월 수상작] 와인이 된 듯 참신한 발상, 걸림 없이 읽힌다

2023. 1. 3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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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와인 읽기
오가을

오래 묵었다는 말은 상처가 많다는 말
나를 알고 있다고 가볍게 흔들지 마
조심은 소중하다는 것 쉽게 깨진 투명한 맘

부딪치는 소리마다 맑은 울음 토하지만
이것만 읽어줘 너에게 물든 내 숨결
조용한 흔들림 속에 숙성된 향기를

요란한 웃음소리 조용한 속삭임도
언제든 부르면 달려가 있을 거야
차갑게 맞아줘도 돼 결국엔 뜨거울걸

■ ◆오가을

오가을

2022년 5월 중앙시조 백일장 입선


차상


겨울 산 보법(步法) -무장사지에서
정영화

내려온 산 그림자로 조금씩은 흔들렸을
걸어도 제 자리인 외로운 탑신 하나
말갛게 금이 간 세월 돌이끼가 걸어간다

산승(山僧)은 산을 안고 산은 또 사람을 안고
이쯤에서 무너졌을 법당의 고요 속에
겨울을 건너는 바람 베고 누운 낙엽 한장

다람쥐가 훑고 지난 도토리만 한 세상으로
탁발을 떠난 제자 빈자리 건너 누워
관 밖에 두 발을 내민 부처를 보고 있다

※ 무장사지 : 경주시 암곡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절터


차하


그리움
전승탁

버선코 고쳐 신고 뒤축을 당겨본다
낮달은 어디쯤에 옷고름 매고 있나
장날에 무명옷 입은 어머니를 보겠네.


이달의 심사평


계묘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첫 문은 여는 1월 투고작들을 설레며 읽었다.

자유시가 아닌 정형시에서 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율격이다. 특히 시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종장의 음보는 더욱 중요하다. 몇몇 작품에서 율격을 벗어난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투고를 하기까지 상당한 고뇌의 시간이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또한 시조는 번다한 말을 줄이며 행간에는 많은 의미를 담아야 한다.

숙독과 논의를 거쳐 이달의 장원에 ‘와인 읽기’(오가을)를 올린다.

발상이 참신했으며 소재의 내면화가 뛰어났다. 무엇보다도 걸림 없이 읽혔다.

특히 “오래 묵었다는 말은 상처가 많다는 말”에 방점을 찍었다. 보내온 다른 작품들도 습작에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상에는 ‘겨울 산 보법(步法)-무장사지에서’(정영화)를 앉혔다.

익숙한 보법인데 진중하며 사유가 잘 녹아들었다. 구조 역시 탄탄했으며 장과 장의 연결이 자연스러웠다. 굳이 지적하자면 보내온 작품들에서 의고체의 울림이 보인다는 점이 다소 염려스럽다. 시조는 전통 형식을 지키지만 내용은 새로움을 담아야 한다.

차하에는 ‘그리움’(전승탁)을 올린다. 선명한 이미지에 단시조의 미학이 잘 담긴 단정한 작품이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도 상당한 시간 시조 창작에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외에 ‘해녀횟집’(배순금), ‘그 남자 타워크레인’(한승남)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음을 밝히며 앞날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서숙희·정혜숙(대표 집필)


초대시조


상강 무렵
서성자

반쯤 썩은 늙은 호박
밑을 도려냈다
서리 앉은 골을 따라
물러진 아랫도리

한때는
피와 살의 일로
뜨거웠을 길이 깊다

자궁을 들어냈다며 그녀가 웃는다
밤새 산을 굴러온 단풍물 소리로

몸 한쪽
흐적흐적 지우는
그믐달 눈이 붉다

■ ◆서성자

서성자

경남 마산출생. 200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시학 신인상. 시집 『쓸 만한 잡담』

마루 한 켠에 빛깔 좋은 늙은 호박이 놓여있다. 호박죽도 끓이고 전도 부쳐 먹는 늙은 호박, 호박을 들어보니 아랫도리가 반쯤 썩어있다. 언 듯 보기엔 멀쩡한 호박인데 언제부턴가 조용히 소멸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늙은 호박은 “서리 앉은 골을 따라/ 물러진 아랫도리”로 시적 매개체가 되어 한 여자의 일생으로 환치된다. “한때는/ 피와 살의 일로/ 뜨거웠을 길”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통해 늙어가는 한 여자의 시간성을 심미적 형상으로 감각화한 것이다.

자궁은 여자에게 있어 원초적 본질이면서 삶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자궁을 도려낸 여자는 “밤새 산을 굴러온 단풍물 소리”를 내며 “몸 한쪽/ 흐적흐적 지우는/ 그믐달 눈이 붉”어 유한한 생의 여정을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시인은 낡고 오래된 것에 대한, 또는 근원에 대한 섬세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음을 이 한 편의 시조에 오롯이 담아냈다.

한때는 삶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했던 지나간 시간에 대한 헌사이며 사람에 대한 상처와 어둠을 감각적으로,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 구현해 냄으로써 서정시의 본질에 다가간다.

‘상강 무렵’이라는 제목이 주는 신선함도 시인의 심미적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덕목이다.

■ ◆응모안내

「 매달 20일까지 중앙 시조의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 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손영희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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