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382] 호남 최후의 부자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2023. 1. 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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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최후’라고 하는 비장한 단어를 써야 되는지는 망설임이 있었지만 쓰기로 했다. 지금부터 150년 전인 구한말부터 만석꾼으로 살기 시작하여 21세기 현재까지 만석에 상응하는 재산을 유지하고 있는 집안이 여수 봉강동의 봉소당(鳳巢堂)이다. 영광 김씨이다. 동학혁명과 일제강점기, 여순사건, 그리고 토지개혁, 6·25라는 역사의 파란만장, 즉 늪지대, 절벽, 호랑이를 거치고도 이 집안은 망하지 않았다. 다른 부자들은 대부분 중간에 거덜 났다.

호남 부자의 품격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 집안이 이 집안이다. 품격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부자의 품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150년을 유지한 품격의 핵심은 바로 베품이었다. 10여 년 만에 봉소당 주손인 김재호(金在皓·81)씨를 다시 만나보니 예전 인터뷰 때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948년에 일어났던 ‘여순사건’의 핵심 당사자 집안이 바로 봉소당이었던 것이다.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제1 순위로 당시 33세의 나이였던 이 집안 주손 김성환(1915~1976)이 여천군청으로 잡혀갔다. 군청은 말하자면 혁명평의회 본부였다. 여수에서 가장 부자였으니까 1번 타자로 잡혀갔던 것이다. 군청의 2층에 가보니까 또 다른 부자였던 김영준이 2번 타자로 잡혀 오고 있었다. 천일고무신 사장이었다.

그런데 봉소당의 종 아들이었던 19세 ‘태주’가 빨간 완장을 차고 2층에 올라왔다. 2층에 붙잡혀온 김성환과 김영준을 감시하고 있던 2명의 보초병을 다른 곳으로 가라고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닌가! 그런 다음에 태주는 벽을 보고 의자에 앉아 말없이 신문만 계속 보았다. 30여 분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말없이 신문만 보는 태주의 태도를 주시하던 김성환은 ‘이거는 도망가라는 암시구나!’ 하고 2층 창문을 통해서 군청 건물을 탈출하였다. 옆에 있던 김영준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했지만, 김영준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 나는 죄지은 게 없다’고 거절하였다. 도망간 김성환은 살았고 2층에 남았던 김영준은 다음 날 총살당하였다.

김성환이 현 봉소당 주손 김재호의 부친이다. 종의 아들로서 빨간 완장을 차고 있었던 19세 태주는 왜 대지주였던 김성환을 살려주었을까? 오히려 보복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다. “증조부대에 30여 명 되는 노비들을 다 풀어주었습니다. 노비문서 불태우고 ‘너희들 다시는 우리 집 문지방을 넘어오지 말아라’고 했죠. 각기 논 10마지기 밭 7마지기도 나누어 주었고 집도 지어 줬습니다. 이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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