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한의 토포필리아] 보이지 않는 도시

한겨레 2023. 1. 2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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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한의 토포필리아]

보이지 않는 도시, 노량진 지하배수로. 사진 배정한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긴 명절 연휴에 무거워진 몸을 위한 선물로 느릿한 산책만 한 게 없다. 겨울 공원의 한적한 풍경을 독점하리라 마음먹고 한강 노들섬을 골랐다. 노량진에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영하 20도 한파에 강바람과 맞서며 한강대교를 건너 텅 빈 섬에 갈 생각을 하다니. 산책이 아니라 극지 탐험이다. 추워도 너무 추웠다. 어디든 몸을 숨겨야 했다. 신간 잡지에서 눈여겨봤던 한 장소가 떠올랐다. ‘노량진 지하배수로’를 향해 내달렸다.

노량진역 7번 출구에서 대방역 쪽으로 200m쯤 걸음을 옮기면 노량진로와 경인선(1호선) 철로 사이 자투리 녹지에 미지의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다. 이질적인 세모꼴 구조물 밑 계단으로 내려가면 10년 전만 해도 빗물과 오수가 흐르던 땅 밑 물길이 나온다. 서울시 동작구가 노량진수산시장 주변 침수를 해소하는 사업을 진행하다 여러 형태의 하수암거(하수가 흘러가도록 땅속이나 구조물 밑으로 낸 도랑)를 발견했고, 일부 구간을 보행로로 고쳐 공공에 개방했다. 지난해 5월 문을 열어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세월의 비밀을 간직한 발밑 세상이다.

개방된 배수로는 92m에 불과하지만 건설 시기와 공법이 다른 다섯구간이 나란히 붙어 있다. 가장 오래된 2구간은 마제형(馬蹄形), 즉 말발굽 형태로 상부의 벽돌 볼트를 화강석 벽이 받치고 있다. 길이 20m가량의 마제형 암거 바로 위는 경의선 철로다. 이 암거는 1899년 개통된 경인선 건설 기간에 축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아치형 4구간은 1950년대에 추가됐고, 3구간의 사각형 철근콘크리트 하수 박스는 시멘트 생산이 시작된 1960년대의 산물로 짐작된다고 한다. 시기별로 형태와 재료가 다른 여러 겹의 단면이 차례로 연결된다. 잠시 걸으며 근대의 하수 인프라와 토목기술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은 박물관인 셈이다.

서울광장, 남대문로, 태평로 지하에서 발견된 20세기 초 하수암거들은 이미 서울시문화재로 지정됐지만 여전히 하수가 흐른다. 우리가 들어가 보고 만지며 걸을 수 있는 지하배수로는 노량진의 경우가 유일하다. 시기도 20년 정도 앞선다. 보이지 않는 지하도시의 근대는 광화문 일대보다 노량진에 먼저 상륙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노량진의 대명사가 수산시장 아니면 학원가지만, 원래 노량진은 서울과 한강 이남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근대의 시작과 함께 제물포에서 달려온 기차가 맨 처음 멈춰 선 곳도 노량진이었다.

세월을 견뎌낸 하수 암거의 거친 단면들이 말을 걸어온다. 사진 배정한

하수로의 변신 프로젝트를 이끈 건축가 최춘웅(서울대 교수)은 도시 유산 중에서도 노량진 지하배수로가 독특한 건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숨겨진 기반시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건축 행위가 암묵적으로 연대하는 권력과 자본의 상징성이 닿지 않는 영역 속에 만들어진 장소이기에 더 특별하다. 누구도 경험해본 적 없는 공간의 기억. (…) 완성과 동시에 아무도 볼 수 없이 묻힐 것을 알면서도 세심한 정성으로 벽돌을 쌓아 만든 공백. 이제 그 공백의 균열을 따라 미약한 빛이 스며든다”(<SPACE> 2023년 1월호).

폭 2.5m, 높이 3.3m, 길이 92m의 작은 지하도시는 칼바람 추위에 지친 산책자를 환대했다. 내려가는 계단에 떨어지는 가느다란 광선과 배수로 바닥의 어두운 간접조명 외에는 빛이 없는 적막의 공간. 판타지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기도 하고, 벽돌담과 돌담, 거친 시멘트 담이 뒤섞인 오래된 동네 골목길을 걷는 느낌도 든다. 시간의 흔적을 머금은 벽을 만지며 걷다 보면 거친 질감의 표면이 밀어를 걸어오고 바닥에 물이 차오르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시간이 공간이 된 것일까, 공간이 시간이 된 것일까. 어렴풋이 들리는 기차소리가 지상도시의 존재를 일깨운다. 떠나기 아쉬워 계속 서성이다 막다른 길 끝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니 노량진수산시장 바로 뒤쪽이다. 땅 밑 물길로 철길을 건넌 것이다.

명절 오후의 우연한 지하 산책에서 돌아온 나의 손에는 수산시장에서 산 방어회가 들려 있었다. 이 난데없는 상황에 쏟아진 의아한 표정들을 뒤로하고 책 몇권을 뽑아 들었다. 이탈로 칼비노의 아름다운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보여주듯, 도시마다 그것의 보이지 않는 도시가 존재한다. 서울의 아래에는 또 다른 서울이 있다. 곱게 모셔둔 벽돌 책 <언더랜드>를 펼쳐 로버트 맥팔레인이 이끄는 대로 우리 발밑의 세상, 지도 바깥의 장소, 보이지 않는 도시를 산책하다 보니 추운 연휴가 훌쩍 지나갔다.

미지의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에 떨어지는 옅은 빛. 건축가 최춘웅 디자인. 사진 배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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