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가 만난 디자이너]<14>독일 베를린에서 만난 글꼴 디자이너 함민주

구선아 기자 2023. 1. 29.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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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도 퓨쳐폰트(Futurefonts)서 처음 '둥켈산스' 발표
글꼴 디자인은 기존 글꼴 양식이나 사조를 근거로
글로벌 디자이너들에게 베를린은 '디자인 천국'
미숙함은 떨치고 자기다움과 꾸준함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
[서울경제]

[디자이너가 만난 디자이너] 디자이너 함민주 인터뷰

서울 종로구의 중심부, 어느 건물 안에서 근무하는 디자이너는 문득 바깥세상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각자의 장소와 공간에서 특별한 지금을 보내고 있을 그들과 만나 또 다른 미지의 장소와 공간을 탐험해 보고자 합니다.

베를린 작업 공간서 신간 ‘글립스 타입 디자인’을 들고 있는 함민주 디자이너

서체 자체가 디자인 요소로서 주 역할을 하는 기조가 꾸준히 트렌드인듯하다. 덕분에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한글 서체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지만 그중 어딘지 모르게 ‘이단아’ 포스를 풍기는 서체가 있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글꼴 디자이너 함민주가 2018년 발표한 ‘둥켈산스’다. 볼드해서 시선이 한눈에 가지만 그렇다고 엄격하진 않으며 적당한 경쾌함이 있어 좋은 서체. 서점이나 미술관을 방문하면 책 표지나 포스터에서 심심찮게 그 존재감을 발견할 수 있다.

둥켈(dunkel)은 독일어로 ‘어둡다’는 뜻이고 산스(sans)는 영어로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자면 부리가 없는 수퍼 블랙 타입의 서체를 의미한다. 두껍고 강하지만, 글자의 검은 영역이 그리는 그림이 마냥 무겁지만은 않은 둥켈산스. 그리고 한글 서체를 디자인하지만 독일 베를린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이 예사롭지 않은 조합에 이끌려 14시간 비행 끝에 직접 베를린 동남부 한적한 동네를 찾았다. 공교롭게도 한국과 독일은 ‘타이포그래피의 근대적 사건’과 관련이 깊은 국가다.

◇작업실 이야기_디자인 도시 베를린

Q.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한글 서체 디자이너. 조금은 생경한 조합인데 어떻게 베를린에 정착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인하우스 서체 디자이너로 7년 정도 경력을 쌓아가다가 2014년에 유학을 결심하게 됐어요. 그즈음 온전히 나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늘 동경하던 네덜란드 헤이그 대학에서 유학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원래는 1년만 공부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요. 마음이 바뀌어서 현지에서 인턴 자리를 알아보기로 했어요. 그러던 중 ‘마이폰츠 닷컴’에 타이포 관련 아티클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 얀 미덴도르프(Jan Middendorp)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네덜란드인이지만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계셨는데 제게 베를린으로 와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해 주셨어요. 저는 당시 영국 회사와 고민하다 최종적으로 베를린을 선택했고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머물고 있습니다.

Q. 베를린은 독립 서체 디자이너들이 많이 찾는 도시라던데 사실인가요?

베를린은 로컬 대학을 졸업 후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른 지역에서 일하던 디자이너들이 많이 모이는 글로벌 도시 중 하나예요. 물가와 거주비가 저렴하고 여러모로 디자이너에게 장점이 많은 곳이죠. 또 한국보다 훨씬 전부터 서체 디자인 분야가 활성화한 도시이기도 해요.

‘타이포 베를린(Typo Berlin)’이라는 타입 디자인 콘퍼런스가 매년 열리기도 했는데 시즌이 다가오면 미국을 비롯한 각국에서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베를린으로 모이곤 했어요. 20세기 가장 오래된 활자 제조사로 꼽히는 그 유명한 ‘모노타입(Monotype)’의 오피스도 베를린에 지사가 있고요. 다양한 이유로 지금도 많은 독립 서체 디자이너들이 베를린을 찾는 것 같아요.

함민주 디자이너 작업실 근처 트램역 풍경/사진=구선아 기자

Q. 베를린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가요?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라는 곳을 가장 좋아합니다. 동베를린에 예술가들이 모여사는 지역인데요. 디자이너 입장에서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가 많아서 참 매력적인 곳이에요. 서울과 비교하자면 요즘 핫한 성수동 같은 분위기랄까요? 저도 과거에 그 부근에서 거주하다가 지금은 좀 더 한적한 베를린 동남쪽 호수 근처로 이사 왔어요.

Q. 베를린에서 교류하는 디자이너 모임이 있나요?

베를린에는 ‘티포슈탐티쉬(Typostamtisch)’라고 하는 타이포에 관심 있는 디자이너 모임이 있어요. 요즘은 자주 참여하지 못하지만 예전엔 한 달에 한 번은 꼭 참석했어요.

◇작업 이야기_명암(明暗)의 하모니

Q. 처음 한글 서체를 디자인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무엇인가요?

저는 서울여대에서 디자인 공부를 했는데요. 당시엔 흔치 않던 한글 디자인 수업이 1학년 커리큘럼으로 있었어요. 수업을 통해서 좋은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고 교수님들께서도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셨어요.

또 학내에 ‘한글아씨’라는 소모임이 있었는데요. 소모임을 통해 동기들과 함께 서체 공부를 하고 전시도 열고 활발히 활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중 몇 작품은 공모전에 제출했는데 수상까지 하게 되니까 ‘아 나는 한글 서체 디자인을 해야 할 운명이구나’ 싶더라고요(웃음).

그 후 ‘아리따체’를 제작하신 이용제 교수님의 ‘한글학교(구 활자 공간)’ 여름방학 워크숍에 참여해 인턴으로 실무 경험을 조금씩 쌓을 수 있었죠.

Q. 서체 디자인할 때 어떤 프로세스가 기반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백지에 막 떠오른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는 것’ 이 서체 디자인의 시작이라고 믿었는데요. 네덜란드에서 공부할 때 ‘서체에 접근하는 방법’을 새롭게 배우고 마인드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어떤 선생님께서 ‘모든 글꼴은 기존 글꼴이나 미술 사조를 근거로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거든요. 그 후로 서체를 제작하기 전에 사료 리서치를 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꼭 거치게 됐어요.

서체 ‘둥켈산스’ 디자인

Q. 둥켈산스를 어떤 계기로 제작하게 되었는지 여쭙고 싶은데요.

한국에 들어왔다가 본문용으로 제작된 명조 서체가 타이틀 디자인에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디자이너가 포스터 타이틀로 힘 주기 위해 본문용 서체를 크게 확대하는 방식을 선택했는데, 그걸 보고 한국에는 아직 묵직한 타이틀용 폰트가 많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죠. 아 물론 의도한 콘셉트일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덕분에 포스터에 쓸 수 있는 단단하고 볼드한 폰트 제작에 도전해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2018년에 ‘퓨쳐폰트(Futurefonts)’라는 외국 폰트 판매 플랫폼을 통해 둥켈산스를 발표했습니다.

한글 폰트는 제작할 때 글자마다 밀도가 달라서 굵기를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가 없어요. 하나하나 다 만져줘야 하죠. 엄청난 일이에요. 하지만 둥켈 산스는 굵은 스트로크 설정으로 새로운 형태가 그려지면서 어느 정도 허용되는 부분이 있었고, 덕분에 글자 자체로 인식되기 보다 조형적 매력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게 됐어요. ‘정제된 키치 함’이 매력인 서체를 만들게 돼서 무척 기뻤습니다.

둥켈산스가 쓰인 책 표지 디자인
둥켈산스가 쓰인 ‘2021 타이포잔치’ 배너 디자인

Q. 둥켈산스 콘셉트는 어디에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둥켈산스는 옛날 영화 포스터에 쓰인 서체들로부터 영감을 받았어요. 보통 강하게 그려진 폰트들이 많죠. 둥켈산스는 특히 눈에 들어왔던 영화 ‘함렡’ 포스터를 참고했어요. 포스터에 딱 두 글자 있었거든요. 거기에 제 콘셉트를 합쳐 스케치 방향을 잡았어요.

Q. 베를린은 지금 어떤 스타일의 서체가 유행인가요?

베를린은 힙스터 디자인으로 유명한 도시예요. 글자를 찌그러뜨리는 등 과장된 스타일이 유행이라 어글리 하고 힙한 그라피티 느낌의 그래픽들이 주로 눈에 띄죠. 반면에 굉장히 심플하면서 정제가 잘 되어있는 스타일도 간간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가끔 한국에서도 베를린 스타일의 디자인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고 놀라곤 해요.

서체 ‘블레이즈’ 디자인

Q. 특히 선호하는 디자인 스타일이 있나요?

개인적으로 둥켈산스처럼 볼드한 폰트를 좋아하는 편이에요. 제작할때 더 재밌어요. 속 공간과 바깥 공간이 어우러질 때 드러나는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거든요. 또 굵은 폰트들은 견본집을 제작할 때의 쾌감이 남달라요.

하얀 공간보다는 블랙 공간이 더 많은 포인트를 선호해요. 그리고 그동안 누가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을 주로 해보고픈 맘이 커요. 그래서 무의식중으로 너무 진지한 걸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해요. 보통 한글 디자이너라고 하면 ‘한글을 굉장히 아름답고 진지하게 표현하는 연구가’를 떠올리는데요. 저는 보다 유쾌하고 개성 있는 형태의 디자인을 선호하는 디자이너예요. 실제 성격도 둥켈산스의 느낌과 살짝 비슷한 편이랍니다(웃음).

서체 디자인 듀오 ‘하이퍼타입'
서체 ‘함렡’ 디자인

Q. ‘하이퍼 타입’이라는 이름의 소규모 서체 디자이너 듀오를 결성하셨는데 소개 부탁드립니다.

‘하이퍼 타입’은 저와 마크 프롬베르크(Mark Fromberg)가 2020년에 설립한 한글과 라틴 문자를 위한 서체 디자인 스튜디오입니다. 제가 네덜란드에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마크는 사실 그곳에서 1년 먼저 공부를 시작한 선배였어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서로 모르고 지내다가 졸업 후 베를린으로 와서 만나게 됐어요. 참 신기하죠? 베를린에서부터는 서로 겹치는 우연히 많았는데요. 베를린 디자이너 모임이나 세미나, 워크숍 등에서 마주칠 때면 늘 일 얘기를 나누곤 했죠. 얼마 전 구글에 함렡(Hahmlet)이라는 폰트를 출시했는데 영문 파트를 마크가 맡아줬어요. 라틴 서체 작업은 제 모국어가 아니라 부족한 면이 있는데 마크가 보완을 해주면서 좋은 파트너가 되었어요.

이제는 ‘하이퍼 타입’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글 라틴 서체 디자인 전문 스튜디오로 활동하려고 합니다. 웹사이트에서 저희가 작업하는 디자인을 곧 직접 만나보실 수 있을 거예요.

노은유 디자이너와 함께 작업한 ‘글립스 타입 디자인’

Q. 독립 서체 디자이너로 활동하고자 하는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독립 디자이너에게는 오롯이 본인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어요. 회사에는 실무를 담당하는 디자이너 외에도 마케팅팀, 심지어 회계 세무팀 등이 있어 업무 분장이 확실한데요. 독립 디자이너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까 조금 더 힘들겠다는 생각은 하죠. 하지만 그만큼 만족스러워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구상한 일을 해내는 그 과정이 노동으로 다가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디자이너로서 독립을 하는 것도 상당한 매력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요즘 유튜브 채널들의 초창기 모습을 보는 게 참 재밌더라고요. 지금은 구독자 수도 많고 프로의 모습을 갖춘 채널이지만, 초창기의 어색하고 투박한 영상을 볼 때 ‘누구나 미숙한 때가 있지만 꾸준함은 결국 프로를 만든다.’는 깨달음을 얻게 돼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뭐라도 시도하는 내 모습이 너무 장하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여주세요. 굉장히 진부한 말인 것 같지만 생각보다 실천하는 분들이 많지 않아요.

도전을 마음먹었다면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지 마세요. 꾸준히 본인이 작업했던 것들을 자신 있게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물론 한국 대중들은 눈이 굉장히 높아요. 그래서 내 작업이 완벽하지 않다면 세상에 내놓기 두려울 거예요. 그런데 그런 마음이 지속되다 보면 영원히 제자리에 멈춰있게 되겠죠. 그러니 시작을 망설이지 마세요. 저는 꾸준히 하면 무엇이든 결국 성공한다고 믿어요.

◇앞으로의 이야기_'나'다운 한걸음

Q. 훗날 독일 베를린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도 염두에 두고 계신지?

베를린에 거주하면서 한국행을 잠시 고민했던 적이 있는데요. 그냥 베를린에 남기로 했어요. 생각해 보니 희한하게도 저는 한국인이지만 베를린에 있을 때 더 ‘나’ 다운 것 같아요. 베를린은 나를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인생을 꾸려갈 수 있는 곳. 삶의 우선순위가 다른 도시랄까요. 내 개인 시간과 공간, 자유가 우선이고 이런 것들을 위해 일하는. 그래서 저는 베를린이 좋아요. 베를린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이런 자유로움을 누리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워요. 현지 친구들에게 베를린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산다면 어디가 좋을지 질문을 던지면 다들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고 해요. 런던이나 뉴욕이 가끔 회자되곤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베를린처럼 물가가 저렴하면서 자유롭고 힙한 도시는 없다는 결론이에요.

Q.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요?

제 개인 라이브러리 폰트를 더 많이 만드는 게 앞으로의 목표예요. 그리고···제 서체들을 프로모션하기 위해서 그동안 인스타그램을 주로 사용해왔거든요? 최근에는 유튜브로 영역을 확장했어요. 인스타그램은 저를 이미 알고 팔로우 하신 분들만 제 게시물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유튜브를 통해 그래픽 디자이너들이나 학생들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도 제 작업이나 디자인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싶어요.

구선아 기자 schatzs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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