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평가 성희롱, 교권 붕괴와 젠더 권력의 콜라보 [정지혜의 빨간약]

정지혜 입력 2023. 1. 29.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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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은 학생이 선생님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놀랍니다. 하지만 현재 교육 현장에서 이런 성희롱은 놀랍기는커녕 아주 비일비재합니다. 다들 참고 쉬쉬하니 알려지지 않을 뿐이죠. 저 역시 여러 번 비슷한 경험을 한 뒤 더 이상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원평가 성희롱 공론화 교사 A씨)

교원평가 서술형 항목에 여러 교사를 상대로 노골적인 성희롱 발언을 쓴 고등학생이 최근 ‘퇴학’ 처분을 받은 사실이 알려져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 학생은 익명으로 쓰는 교원평가 항목에 6명의 교사를 상대로 “김정은 기쁨조나 해라 X발”, “XX 크더라 XX 나오는 부분이니?”, “OO이 XX통 너무 작아” 등의 발언을 남겨 자신을 가르친 선생님들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안겼다. 욕설 필터링에 의해 걸러지지 않게 하려고 교묘히 글자를 변형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피해 교사들이 함께 사건을 공론화한 뒤 우여곡절 끝에 열린 지난 17일 교권보호위원회 회의에서는 여간해선 나오기 힘든 가장 센 처분이 내려졌다. (관련 기사: [단독] ‘교원평가 성희롱’ 학생 퇴학 처분… “온정적 처리 관례 깼다”) 성희롱을 비롯한 학생의 일탈 행동에 교육 기관이 미온적으로 대처해 온 관례가 깨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동안 장난으로 치부되거나 유야무야 넘어갔던 남학생의 여성 교사 대상 성희롱 문제가 ‘범죄’라는 인식을 각인할 선례가 됐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처음 문제제기를 했을 때만 해도 학교나 교육청은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가해 학생이 누구인지 알아보려는 노력조차 없었고, 경찰 역시 정식 접수가 될지 모르겠다고 갸우뚱해했다. 이러한 소극적 태도는 언론 보도를 통한 공론화와 민원이 늘어나면서 빠르게 바뀌었다. 피해 교사 측은 “사회적 공론화 과정이 없었다면 교육 당국이 여느 때처럼 관망하며 조용히 넘어가려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가해 학생 특정·처벌은 ‘계도’ 위한 것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 “미성년자에게 너무 과한 처벌을 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이런 우려는 교육 현장의 실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일단 남학생의 여성 교사 대상 성희롱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번 사건을 공론화한 교사 A씨에 따르면 요즘 학생들의 인터넷 문화, 사용하는 언어가 바뀐 것 등 다양한 문제로 인해 이런 수준의 성적 모욕 발언은 현장에서 매우 흔한 일이 됐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일상적인 데 비해 어떤 교육도 대책도 없다는 데서 A씨는 큰 문제의식을 느꼈다. 문제가 되는 언행에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학생이 잘못을 깨달을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의 일탈 행동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A씨를 비롯한 피해 교사들은 처음부터 가해 학생을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도 학생이니 사법적 처리보다는 학교에서 교육해야 한다고 여겨 교내 공론화를 통해 스스로 잘못을 인지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일 내에 학생이 자수하고 반성하면 고소할 생각은 없다”고 교감·교장 선생님에게 밝혔다.

그러나 교육적 처리 방안을 고민해 각 부서에서 협조해달라는 수 차례의 요청은 묵살됐다. 혹시라도 가해 학생이 받게 될 압박을 고려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일관함으로써 학교 울타리 안에서 학생을 계도할 기회는 날아갔다.

이번 사건 이후 전국교사노동조합이 긴급 실시한 조사에서도 교원평가 성희롱을 직접 겪거나 다른 교사의 피해를 목격한 경우는 10명 중 7명에 달했다. 그러나 피해 교사 98.7%가 ‘그냥 참고 넘어간다’고 답했다. ‘고소나 고발 조치를 한다’는 응답은 0.3%에 불과했다. 그만큼 무방비 상태로 피해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방증한다. 피해 교사가 공론화한다는 것은 보수적인 교직 사회에서 “너무 힘들고 복잡하고 감당할 것이 많기 때문”이라고 A씨는 말했다.

‘어떻게 가르쳤던 학생을 선생이 고소하냐’는 시선, 각종 2차 가해, 동료들 사이에서 나올 반응 등을 모두 감수하면서도 A씨가 공론화를 결심한 것은 “그냥 넘어가는 일이 반복될 때 결국 더 큰 상처가 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다. 신규 교사 시절 학생에게 성희롱 피해를 입으면 ‘내가 잘못한 건가’, ‘원래 다 이런 건가’라며 자기검열만 하고,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사태 해결을 위해 나서기는커녕 교사들을 회유하기 바쁜 교육청의 태도 역시 겪어보면서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것”임을 뼈저리게 알게 됐다.

이는 자신뿐 아니라 여러 교사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교사는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는다. 학생도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니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을 안 이상 이번만큼은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피해자도 6명이나 됐기 때문에 머리를 맞대고 사회적으로 알리자고 결심했다.

공론화를 하고 나니 오히려 학교도 교육청도 조심하면서 많이 도와주려고 했다고 A씨는 전했다. 경찰도 빠른 수사로 가해 학생을 특정했다. 동료 여성 교사들도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고, 같이 민원을 넣어주거나 응원한 이들이 많아 큰 힘이 됐다고도 했다.

◆교권 침해보다 ‘젠더 이슈’에 가까운 이유

이번 사건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교권 침해보다는 젠더 이슈로 접근해야 한다. ‘선생님 그림자도 못 밟던 시절이 있었는데’라며 단순히 ‘요즘 애들’의 문제로 뭉뚱그려서는 문제 해결이 요원하다. 학교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똑바로 봐야 한다. 남학생은 여교사를 대상으로, 남교사는 여학생을 대상으로 저지른다. 이 문제의 본질은 교사-학생 구도가 아니라 ‘젠더 권력’의 작동 그 자체다.

온라인 커뮤니티, 유튜브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왜곡된 10∼20대 남성의 성 인식은 성평등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사회의 발목을 거세게 붙잡고 있다. 여기에 어떤 대응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이를 참다 못해 반격하거나, 계도를 통해 잘못임을 알려주려는 여성들이 ‘과격해서’ 정말 문제인 건지 자문해 볼 일이다.

지난해 1월 한 여자고등학교 재학생이 군 장병에게 보낸 장난스러운 위문편지 논란과 비교하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문제의 편지에는 “저도 고3이라 죽겠는데 이딴 행사 참여하고 있다”거나 “인생에 시련이 많을 건데 이 정도는 이겨줘야 사나이”, “눈 오면 열심히 치우세요” 등의 문장이 담겼다.

애초에 여고생이 위문편지를 사실상 의무로 써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의 부적절함은 물론이고, 교원평가에서 남학생이 단 성희롱 글과는 절대 등치될 수 없는 수준의 발언이다. 그러나 당시 온라인에는 이 학생의 신상이 털려 공유되고, 악성 댓글이 집단 공격으로 쏟아졌다. 해당 여고를 향해 “세월호 같은 사고 나길 기원한다”거나 “전쟁 나서 위안부 끌려가야” 등의 악플과 다수의 성희롱성 발언, 학교를 찾아가겠다는 위협 등이 가득했다.

A씨는 “여교사는 가르치던 남학생에게 ‘김정은 기쁨조나 해라’는 말을 듣고, 여고생은 위문편지에 조롱을 했다는 이유로 ‘기쁨조로 팔려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는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처럼 여학생을 괘씸해하던 과도한 비난의 화살은 이번 사건에서는 남학생을 향하지 않고, 오히려 피해 여교사들을 겨냥했다. 공론화에 나선 교사들은 뉴스 댓글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으로 한 달 넘게 도 넘는 2차 가해에 시달리고 있다.

“사건 초기에도 성희롱이 난무하던 디시인사이드에서 이번 퇴학 건을 두고 또 다시 성희롱 댓글이 달리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한 A씨는 이런 공격들 때문에 “중증 우울장애로 6개월의 치료와 안정이 필요하다”는 진단까지 받았을 정도다.

이번 교원평가 성희롱 같은 사태는 교권의 무너짐에 더해 젠더 권력이 이중으로 작동한 경우임을 인정해야 한다. 가정도, 학교도, 교육청도, 사회도 남학생 교육에 손을 놓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폭력성이 키워진 것이다. 이를 정면으로 들여다보지 않고 내놓는 교원평가 시스템 개선안 같은 건 허울일 뿐이다.

 
*‘정지혜의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그랬듯 빨간약을 먹고 나면 보이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예민하게 분석해보는 코너입니다.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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