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사람 하나 없던 내가 ‘이야기꾼’이 되었다

한겨레 2023. 1. 2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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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양다솔의 저도 말해도 될까요][한겨레S] 양다솔의 저도 말해도 될까요
하고 싶은 말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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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작가가 되었다.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작가님? 작가님?”

누군가 한참 작가를 찾기에 대체 누가 대답을 안 하나 하고 함께 두리번거리다 보니 그 작가가 나였던 경우가 많았다. 오랜 세월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 쌓여 있던 한글 문서들이 모여 하나의 종이 무더기가 되었을 뿐인데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나를 작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인정하기 어려웠고 얼떨떨했으며 거북한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정신없이 졸면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헐레벌떡 깨서 내려보니 그 정류장이 ‘작가’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 버스는 한동안 올 것 같지 않아서 어디에라도 묵어야겠기에 그 동네에 있는 모텔에서 장기 투숙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질리도록 혼자 있었다

외동딸로 자랐다. 부모님은 맞벌이였다. 늘 혼자 있었다. 정말 질리도록 혼자 있었다. 가족 구성원이 많은 사람은 평생 이해하지 못할 완전한 적막이라는 것이 내가 사는 세상에는 있었다.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굶거나 배우지 못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가볍다. 가볍고, 작고, 치명적이다. 이를테면 어느 날은 놀다가 팔꿈치를 찧었다. 전기가 통한 듯 찌릿한 아픔이 순식간에 퍼졌다. 한동안은 꼼짝도 못 할 만큼 아프다. 그때 주변에 사람이 있다면 말할 것이다. “와, 진짜 아프겠다.” 그런데 그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삐쭉 웃음이 난다. “어, 진짜 아프다.” 그러면 놀랍게도 그것은 지나간 일이 된다.

나의 경우엔 조금 달랐다. 팔꿈치를 찧는다.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아프다. 주변은 변함없이 적막하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다가 털고 한참 뒤에 일어선다. 그것을 본 사람도, 한마디를 건네준 사람도 없다. 나는 다른 일을 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런데 그 순간 말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일이, 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한다. 나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종일 팔꿈치를 매만진다. 나 아까 지나가다가 여기에 팔꿈치를 찧어서 정말 아팠어, 하고 엄마가 퇴근하고 돌아오시면 꼭 말씀드려야지 하고 다짐한다. 그러다 지쳐 잠이 든다. 그런 밤들은 이어진다. 오늘 수정이가 나한테 상처 되는 말을 했어, 열쇠를 잃어버렸다가 겨우 찾았어, 오늘 너무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렸어, 떡볶이가 퍼졌어.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사소한 말들이 투명하게 쌓여간다. 꿈속에서 반복된다.

다음날 피곤한 부모님을 붙잡고, 있었던 일들을 쉴 새 없이 늘어놓는다. 그런데 이야기는 달라져 있다. 식어 있다. 상해 있다. 있는 힘껏 몇 문장을 내뱉어보지만, 그때 그 감정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고 납작하다. 부모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집을 나선다. 나는 그런 말이 아니었다고 소리친다. 혼자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다.

말하고 싶은 순간에 말하고 싶은 상대를 만나는 일은 내 인생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형제와 식구가 많은 친구가 말하는 게 귀찮다거나 혼자 있고 싶다고 할 때마다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모든 일이 함께할 때 더 즐겁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귀엽다고, 예쁘다고, 힘들다고, 즐겁다고 말하기 전까지 세상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10대 내내 유일한 내 꿈은 단짝 친구를 사귀는 거였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어주고 나눌 친구를 만나고 싶었다. 친구들을 만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최소 2주 전부터 쌓인 이야기가 있었으니 나에겐 시간이 없었다. 친구들은 난데없이 2주 전에 팔꿈치를 찧었다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는 나를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디를 가나 말하는 애들보다는 들어주는 애들이 인기가 많았다. 친구들은 나를 피해 다녔다.

한달에 딱 두번 말할 기회

그런 나에게는 한달에 딱 두번 말할 기회가 주어졌다. 친구가 딱 두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에게 말했다. 한달에 한번만 만나자. 그들은 그 어린 나이에도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좋고 또 얄미워서 눈을 흘기면서도 고맙다고 말했다. 그 두번의 기회를 십분 활용하기 위해 그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했고 푸짐한 식사를 대접하였으며, 거실 다도 상 앞에 앉혀 귀한 차들을 줄지어 내려주었다. 친구가 자리에 앉으면 나는 말했다. “준비됐어?” 한 맺힌 이야기꾼의 토크콘서트가 펼쳐졌다. 반나절이 꼬박 지나서야 친구는 이야기의 감금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었던 나에게 그 기회를 얻는 방법은 늘 재미에 있었다. 절실했다. 무조건 재미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방문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냉혹한 현실이었지만 자명한 일이기도 했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하는 것만큼 큰 고역은 없으니까. 다행히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넘쳐났다. 늘 머릿속으로 그 순간을 위한 대본을 썼다.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 무심코 계속 듣게 될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로 엄선했다.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 가장 재밌고 중요한 이야기로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꾸렸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한참을 연달아 들으면 재미가 없으니, 강 약 중강 약의 묘미를 살려 밀고 당기며 강도를 조절했다. 철저히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지루한 부분은 과감히 생략했으며, 요점은 분명하게 하고, 기승전결을 깔끔하게 했다. 적절한 순간에 연기와 표정은 필수였고, 하이라이트에서는 모든 에너지를 발산해야 했다. 그러자 언젠가부터 내가 기뻐했으면 하는 부분에서 친구가 기뻐했고, 슬퍼했으면 하는 부분에서 슬퍼했으며, 웃었으면 하는 부분에서 웃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마음만 먹으면 이야기로 기뻤다 슬펐다 널을 뛸 수도 있었다. 반나절의 토크콘서트가 끝나면 말하는 나도 듣는 친구도 모두 진이 다 빠져 있었다. 친구는 말했다. “이 얘기 혼자 듣기 아깝다.”

그렇게 어느 순간 나는 이야기꾼이 되어 있었다. 말할 기회가 없어서,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전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아서 수많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작가나 코미디언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나에게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언제든 친구에게 대뜸 전화를 걸어 “지금부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할 건데 준비됐어?” 하고 묻는 사람이 되었다. 그 이야기는 짧게 끝나는 법이 없었다. 마냥 기쁘거나 마냥 슬프기만 하지도 않았다. 대부분 징글징글하고 어리석었으나 묘하게 빛나는 구석이 있었다. 한 타래의 이야기가 발화되고 그것은 바람처럼 상쾌하게 나를 씻겨 나갔고 그렇게 지나간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내일의 이야기로 나아가는 나에게 친구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말했던 그대로, 글로 써봐.”

글 쓰고 말하는 사람이다. 에세이집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유료 뉴스레터 ‘격일간 다솔’을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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