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카페] ‘사랑의 호르몬’은 없다, 옥시토신 없어도 들쥐 가족 유지돼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2023. 1. 2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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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토신, 들쥐 유대감 높인다고 알려져
수정란에서 옥시토신 반응 유전자 차단
그래도 암수 떠나지 않고 함께 새끼 부양
연구진 “생존 위해 대체 시스템 작동”
초원들쥐 가족. 다른 들쥐와 달리 초원들쥐 수컷은 짝짓기를 하고 나서 암컷을 떠나지 않고 나중에 태어난 새끼를 함께 돌본다./미 에모리대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oxytocin)은 바람둥이의 눈에 콩깍지를 씌워 평생 충실한 남편이자 아빠로 살게 한다. 30년 넘게 과학계의 정설로 통하던 이론이 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다. 옥시토신에 반응하지 못하도록 유전자를 변형해도 여전히 짝을 배신하지 않고 새끼도 잘 키운다는 동물 실험 결과가 나온 것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UCSF)의 데브아난드 마놀리 교수와 스탠퍼드대의 니라오 샤 교수 연구진은 28일 국제 학술지 ‘뉴런’에 “유전자 가위로 옥시토신 호르몬 수용체를 없애도 초원들쥐(학명 Microtus ochrogaster)가 정상적으로 짝을 짓고 암수가 함께 새끼를 키우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랑 호르몬 감지 못해도 가족 유지돼

옥시토신은 아기를 낳을 때 엄마의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자궁 수축 호르몬이다. 아기가 젖을 빨 때도 옥시토신이 분비돼 엄마와 아기의 친밀감을 높인다. 출산과 양육에 필수적인 호르몬인 셈이다.

미국 일리노이대의 동물학자인 로웰 게츠 교수는 북미대륙의 초원들쥐는 다른 들쥐와 달리 한 번 짝짓기를 한 암수가 평생 같이 산다는 것을 발견했다. 1990년대 초 같은 대학의 신경내분비학자인 수 카터 교수는 옥시토신이 들쥐에게 사랑의 호르몬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암컷에게 옥시토신 억제 약물을 주사하자 짝짓기를 한 수컷을 떠나갔다.

연구진은 초원들쥐가 태어날 때부터 옥시토신에 반응하지 못하면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 알아보기 위해 실험을 진행했다. 앞서 옥시토신을 분비하지 못하는 생쥐 암컷은 젖을 분비하지 못하고 결국 새끼가 굶어 죽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연구진은 효소 복합체인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로 초원들쥐 수정란에서 옥시토신과 결합하는 수용체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잘라냈다. 이 수정란을 대리모에 이식해 암수 들쥐를 낳았다.

예상과 달리 옥시토신 수용체 없이 태어난 들쥐도 정상적으로 짝짓기하고 암수가 함께 새끼를 양육했다. 암컷은 다른 들쥐보다 양이 적기는 하지만 젖을 분비했다. 새끼는 체중이 덜 나갔지만 젖을 뗄 때까지 부모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았다. 사랑의 호르몬 없이도 사랑이 충만한 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옥시토신 수용체 유전자 차단 실험. 초원들쥐는 암수가 평생 같이 살며 새끼를 낳아 키운다(윗줄). 연구진은 먼저 들쥐 수정란에서 옥시토신과 결합하는 수용체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잘라냈다(1). 이 수정란을 배반포 단계까지 배양하고(2), 대리모에 이식해 새끼가 태어났다(3, 4). 옥시토신 수용체가 없는 들쥐도 정상적으로 짝짓기하고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며 암수가 같이 부양했다(아랫줄)./Neuron

◇옥시토신 막히자 대체 시스템 작동하는 듯

미국 컬럼비아대의 신경과학자인 비앙카 존스 말린 교수는 이날 네이처지에 “이 놀라운 결과는 새로운 과학 연구 기법이 나오면 학계의 정설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줬다”고 말했다. 유전자 가위라는 혁신적인 연구 기법으로 정설을 반박했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진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이전과 다른 접근을 했다. 이전 연구는 다 자란 들쥐에게 옥시토신 차단제를 주사하고 행동 변화를 관찰했다. 반면 이번 연구는 수정란 단계부터 옥시토신에 반응하지 못하도록 유전자를 변형했다. UCSF의 마놀리 교수는 “수정란 발생 과정에서 옥시토신 결핍을 상쇄하는 다른 기전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그런 방법은 다 자란 들쥐에서 갑자기 옥시토신 신호 체계가 차단됐을 때는 작동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들쥐 옥시토신 연구의 선구자인 수 카터 버지니아대 교수도 이날 미국 공영라디오방송인 NPR에 “임신 단계부터 옥시토신 체계가 결핍되면 태아가 정상적으로 발달하도록 들쥐가 다른 체계를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터 교수는 “이번 발견은 중요하지만 놀랍지는 않다”며 “오랜 시간 지속되는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 과정은 단 하나의 분자가 맡기에는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했다.

옥시토신과 비슷한 호르몬인 바소프레신이 사랑 호르몬 역할을 대체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2004년 미국 에모리대의 래리 영 교수는 초원들쥐 암컷이 짝짓기하면 바소프레신 호르몬을 분비하고, 이 호르몬이 바람둥이 수컷을 헌신적인 남편으로 탈바꿈시킨다고 밝혔다. 래리 영 교수도 독자적으로 UCSF 연구진과 같은 실험을 진행했지만, 아직 결과를 발표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초원들쥐 암수. 한 번 짝짓기하면 평생 같이 살며 새끼도 함께 키운다./Nastacia Goodwin

◇자폐 치료 등에 효과 없었던 이유 설명돼

이번 결과는 그동안 옥시토신을 사람에 적용한 시도가 실패한 이유를 설명해준다는 분석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자폐증 치료이다. 동물 실험에서 옥시토신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새끼가 어미를 따라다니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치 인간이 자폐증에 걸린 것과 같다.

하지만 옥시토신은 자폐 치료에서 별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스탠퍼드대의 샤 교수는 “옥시토신에 사랑의 호르몬이라는 자격을 주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며 “현재로선 사회적 애착 행동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옥시토신이 만병통치약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참고자료

Neuron, DOI: https://doi.org/10.1016/j.neuron.2022.12.0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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