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의 영화뜰] 산왕 정우성이 비로소 심장에 각인된 이유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2023. 1. 28. 10:3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잘 알려진 것처럼 고교 농구팀 북산에 소속된 송태섭의 이야기다. 이때 송태섭만큼의 비중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눈에 띄게 그려진 인물이 바로 산왕 정우성이다. 강백호, 채치수, 정대만, 서태웅 등 북산 주인공의 이야기는 모두 원작에서 알던 감동 그대로지만, 북산의 마지막 경기 상대인 산왕의 정우성은 조연 캐릭터 중 유일하게 보강된 서사로 관객 앞에 나선다.

▲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컷.

정우성은 원작 만화에서도 비교적 상세히 설명된 조연 캐릭터이긴 했다. 일본 내 최고의 농구 실력을 자랑하는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치열하게 농구를 연습했다. 그리고 실력이 다소 들쑥날쑥한 북산을 얕보기보다는, 경기 직전까지 VCR을 돌려보며 승리를 준비하는 산왕의 중심축을 이루는 강한 인물로 성장했다. 다만 인간적인 애정을 붙일 여지는 적은 캐릭터였다. 북산에 이입한 채로 만화를 보는 독자 입장, 특히 그와 1대1로 맞붙게 되는 서태웅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정우성은 실력으로 뛰어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장벽이었고 동시에 주인공들의 승리에 제동을 거는 장애물로 기능했다.

다시 돌아온 애니메이션은 정우성의 캐릭터를 보다 세밀하게 갈고 닦아 관객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전한다. 일단 정우성의 미국 농구 리그행을 예고하던 원작의 중요 대사를 과감하게 생략버렸다. 이는 원작에서 확실히 보증했던 미래를 이번 경기에서만큼은 잠시 유예하겠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 대신 원작에는 없던 에피소드를 새롭게 넣었다. 홀로 훈련 중이던 정우성이 신사에서 진실한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다. 그는 “이곳에서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으니, 내게 필요한 경험을 하게 해달라”고 비는데, 이 장면은 결국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구성하는 성장 서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가 된다.

정우성의 기도는 더 큰 무대에서 활약하고 싶어 하는 기량 좋은 선수의 당연한 희망 사항이다. 다만 내가 발 딛고 있는 땅에서는 모든 것을 다 이뤘다는, 다소간의 교만이 묻어나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북산이 산왕을 만나기 전에 맞붙었던 풍전처럼 타 팀이나 타 선수를 얕보는 일차원적인 형태의 교만이 아니다. 세상의 높음과 깊음을 아직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어린 주인공이 품은 스스로에 대한 과신에 가깝다.

그의 기도 장면이라는 '떡밥'은 결국 극 말미 완벽하게 회수된다. 치열한 경기의 결과가 결국 북산의 승리를 가리키자, 라커룸으로 돌아가던 정우성은 돌연 벽에 기대어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분통한 눈물을 짓는다. “필요한 경험을 하게 해달라”던 자기 기도의 답이 패배임을 알게 된, 이제 막 쓴맛을 본 '인생 초년차'의 뼈아픈 첫 경험이다.

10대 시절 만화 '슬램덩크'를 보고 자란 독자는 십수 년 넘는 사회생활을 경험한 뒤 3040의 관객이 되어 다시 극장을 찾고 있다. 이미 자기 한계에 부딪혀본 적 있는 이들이고, 실력으로 주변을 크게 앞서나가던 주변 사람이 돌연 고꾸라지는 일을 한 번쯤은 목격하게 된 시점이다. 그들이 작은 키 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점에 농구 인생의 무기를 고민해야 했던 송태섭에 가까웠던 인물이든, 꽤 완벽한 요건을 갖춘 줄 알았지만 뒤늦게 자기 경험의 허점을 발견해 혼란을 겪는 정우성과 비슷했던 경우이든, 결국은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허들과 겪어내야 할 진통은 있는 법이라는 사실만큼은 어느 정도 체감하는 때이기도 하다.

▲ 산왕공업고등학교 2학년 정우성. 사진=나무위키

송태섭과 정우성이 미국에 진출해 경기로 다시 맞붙는다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태생적 한계와 마음 아픈 가정사를 극복하고 정상급에 오른 송태섭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이유가 충분한 언더독 스타로 자리매김 했다면, 체격을 불리고 포지션을 바꿔가며 자기 살 길을 다시 모색하는 정우성은 '노력형 천재'로서 제 역할을 부단히 증명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패배를 겪고 다시 일어서야 하는 건 타고난 요건이나 주어진 여건과는 상관없는 모두의 숙명이며, 그 숙명을 성실하게 관통해내는 자 만이 크고 작은 성장을 이뤄낼 수 있음을 증명하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감격스럽다.

미국에서의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 정우성은 양손으로 두 땅을 내리치는 호전적인 동작으로 송태섭을 적극 방어하기 위한 태세를 갖춘다. 이제 막 삶의 고민을 시작한 정우성의 용감한 분투를 상징하는 대목에서, 다른 주연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이 '슬램덩크'라는 만화를 사랑하는 팬들의 심장에 각인된다. 그의 뒷이야기가 못내 궁금해진다.

Copyright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