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의 꽃미남인 ‘이 남자’…알고보니 대량학살 주범이었다?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1. 28. 10: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색-6] 그는 유대인이 싫었습니다. 몰려 다니면서 자신들만의 경전을 외는 것도, 머리카락 양쪽 끝을 길게 늘어뜨린 특이한 모습도 마뜩잖았습니다.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악다구니를 쓰는 모습은 더욱 혐오스러웠습니다. 그는 결심합니다. “권력을 잡으면 저 유대인 놈들 다 쓸어버리겠어.”

최고의 권력에 그가 올랐습니다. 이제 차별과 학살의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일반인과 유대인을 분리하는 작업을 실행했습니다. 유대인이 노란색별을 옷에 붙일 것을 강요합니다. 시민들이 유대인에게 언제든 린치를 가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했습니다.

1941년 7월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 동부에서 유대인 여성이 청년과 소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쫓기고 있다. 나치 점령지에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지 증명하는 사진이다.
명민한 독자께서는 ‘아돌프 히틀러’를 떠올리시겠습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중세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9세(성 루이)가 그 주인공입니다. 유대인 혐오와 학살은 1000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독일 히틀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오랜 혐오의 역사가 만들어낸 괴물입니다. 유대 민족의 수난사를 사색합니다. 혐오가 정치와 만나면 어떤 비극으로 귀결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도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고를 마감한 1월 27일이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입니다.
화가 엘 그레코가 그린 루이9세 초상화(1590년 작품). 루이9세는 가톨릭에 심취해 추후 성인으로 시성되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유대인 차별과 학살에 앞장 선 인물이었다.
중세의 ‘히틀러’가 가톨릭 성인이라고?
루이 9세는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 중 한명입니다. 1226년 즉위한 그에 대해 한 이탈리아 학자가 언급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호리호리하고, 우아하며, 늘씬하다. 피부가 깨끗하고 금발에서 광채가 흘렀으며 온화한 눈빛은 우아함으로 빛나고 얼굴이 하얗고 황홀했다.”
루이9세는 걸인의 발을 직접 씻겨주거나(왼쪽), 가난한 이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등 같은 기독교인에겐 너른 사랑을 베푼 임금이었다. 그만큼 이교도들에겐 가혹한 모습을 보였다.
외모만큼이나, ‘신실함’으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십자군으로 두번이나 출정했었고, 예수의 가시면류관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거액을 주고 사 오기도 했었지요. 걸인들의 발을 직접 씻겼고, 가난한 이들에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해진 옷을 입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예수의 고행을 간접적으로 느낀 인물이었습니다.
루이9세의 낡은 셔츠와 채찍. 그의 청빈한 삶을 보여주는 물품들이다. 루이9세는 예수의 고난을 간접체험하기 위해 수시로 자신의 몸을 채찍질 한 것으로 전해진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법입니다. 믿음이 견고할 수록, 배타성도 날카롭지요. 가톨릭에 심취해 있었기에 그는 하느님의 왕국을 프랑스에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유대인이 첫 표적이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히 말합니다. “유대인과 토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일”이라고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로 유명한 파리의 생트 샤펠은 루이9세가 건립을 지시한 건물이다. 예수의 가시면류관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구매한 뒤, 이에 걸맞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생트 샤펠을 건립에 4만 리브르가 들었다. 가시면류관은 그 세배에 달하는 13만 5000리브르에 사들였다. 성왕 루이의 신실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색출작업이 시작됩니다. 1269년에는 노란색 고리를 옷에 달지 않고는 공공장소에 나타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800년 후 히틀러가 유대인들에게 강제한 노란색 별의 선조인 셈입니다. 루이 9세는 유대교의 경전인 탈무드를 태우는 ‘분서’도 잊지 않았죠. 그의 신민들이 노란 별을 단 유대인을 학살하는 건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16세기 독일 보름스의 한 수채화에 묘사된 유대인 모습. 돈 주머니와 노란색 유대인 뱃지가 당대의 차별을 증명하고 있다.
편집증적인 신실함으로 그는 가톨릭으로부터 ‘성인’ 시성을 받습니다. 그가 성왕(聖王) 루이 (Saint Louis)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프랑스 왕 중 유일한 성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을 끊임없이 차별한 공로를 인정받은 셈이죠. “중세의 ‘히틀러’가 가톨릭 성인이 됐다”는 표현은 지나친 걸까요.
나치가 유대인에게 강요한 노란색 별 뱃지. 옆에 독일어는 “누구든지 이 표식을 달고 있는 사람은 우리 국민의 적입니다”를 뜻한다. 1942년 7월 사진.
유럽인들은 왜 그토록 오랜시간 유대인을 증오했나
루이9세를 비롯해 유럽인들은 왜 그토록 유대인을 혐오했을까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계 있는 민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고발한 이들이 유대인이었죠. 크리스천에게 유대인이란 예수를 죽음에 빠뜨린 존재였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명민한 상인감각으로 유럽 전역에서 무던히 살아갔지요. 서기 1000년까지는요.
프랑스 왕실이 1182년 유대인을 추방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노란색 뱃지를 단 이들이 유대인이다.
유대인을 향한 수난은 서기 1000년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는 유대인에 대한 간헐적 학살이 있었지만, 새 천 년이 다가오면서 혐오가 짙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다가오는 ‘새 천 년’에는 깨끗하고 신실한 크리스천만 존재해야 한다”는 ‘종말론’이 대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깨끗한 대한민국을 위해 정치적 상대방을 제거의 대상으로 삼는 한국 정치와 어쩐지 닮았습니다.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퍼지면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사례도 많았다. 산 채로 유대인을 태우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마침, 1096년 유럽 전역에 예루살렘을 되찾아야 한다는 십자군 운동은 유대인 학살을 촉발하는 기폭제였습니다.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결성된 십자군이 공격한 건 이슬람교도들이 아닌 유대인이었습니다. 성직자 폴크마르의 지휘로 모인 작센의 십자군들도 프라하에서 유대인을 학살했지요. 역사학자 S.W. 배런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 1차 십자군 이래로 반유대적 박해는 위험스런 전염병처럼 번졌다. 민족적 경계를 초월한 대중적 정신병이었다.”
흑사병의 유행, 재난과 기근도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됩니다. 시민들을 죽음에 빠뜨린 전염병은 체제 불안 요소였습니다. 위기에 집권 세력은 아주 쉬운 전략을 택하곤 합니다. 특정 소수자 집단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방법입니다.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이유로 수없이 많은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루이9세의 유대인 혐오의 배경에는 역사적 맥락이 자리합니다.
노란색 뱃지를 달고 있는 유대인이 화형을 당하는 모습은 전 유럽에서 발견된다. 1515년 삽화.
나치를 피해갔더니...다시 만난 ‘성왕 루이’
유대인과 성왕 루이의 악연은 중세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1939년 5월 나치의 유대인 차별이 노골적으로 벌어지자, 유대인 937명이 독일 함부르크에서 여객선을 탑니다. 난민의 신분으로 새로운 나라에 정착하기 위해서였죠. 쿠바를 거쳐 그들은 미국으로 가길 바랐습니다. 간절하고, 절실했습니다. 손에 쥔 입국 허가서에는 땀으로 흥건히 젖었습니다.
독일 함부르크의 유대인들이 나치 박해를 피해 쿠바를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하바나 항구에 도착하자, 얄궂게도 쿠바 대통령이 갑자기 입국을 승인하지 않습니다. 나치가 이미 수를 썼던 것이지요. 배를 돌려 미국 플로리다 항구에 입국을 시도하지만, 미국 해안경비대도 이를 허가하지 않습니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갑니다. 배가 정박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치의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유대인 집단학살 계획)의 희생자 명단에 이들의 이름이 오릅니다. 운명의 장난일까요. 이들을 태웠던 배 이름. ‘세인트 루이스’호입니다. 루이 9세, 즉 성왕 루이의 이름을 딴 배가, 유대인들을 다시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1939년 세인트 루이스호에 탑승한 유대인 승객들. 아메리칸 드림을 꿈 꾼 이들의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쿠바 입항 거부로 결국 유럽으로 되돌아 갔기 때문이다. 승객 900여명 중 약 4분의 1이 나치 가스실에서 학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혐오와 정치가 만났을 때...지금 우리의 모습은?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은 600만으로 추정됩니다. 중세부터 학살된 유대인은 감히 그 수조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조직적인 학살에는 히틀러 개인의 악마적인 성격만 있었던 건 아닐 겁니다. 독일 시민 내면에 똬리를 튼 유대인 혐오가 학살의 불쏘시개였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 학살을 결정한 건 군주였지만, 언제나 평범한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유럽사회의 오랜 유대인 혐오의 결과였습니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되기 직전 모여있는 유대인 여성들과 어린아이들. 민족 혐오의 피해는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까지 향한다. 독일 연방기록 보관소 소장.
스스로 내면을 성찰해 봅니다. 내 안에 어떤 혐오의 감정이 몸집을 불리고 있는지를, 그 혐오가 극악의 정치인을 키울 자양분이 되는 것은 아닌지를요. 혐오와 정치가 만나면, 언제나 비극이 벌어집니다. 시민의 덕목은 특정 성별·민족·정치집단을 향한 혐오를 깨끗이 씻어내는 일이 아닐까요.

매해 1월 27일은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International Holocaust Remembrance Day)입니다. 1945년 이 날,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됐습니다. 유대인의 아픔을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또 다른 박해가 이 땅에서 재현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1942년 6월 독일이 점령한 파리에서 노란색 배지를 착용한 여성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거리를 걷고 있다.
※추신

윗글은 중세의 유대인 혐오히틀러 유대인 학살의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을 기반으로 합니다. 종교학자 이스마엘 보겐이 대표적 학자입니다. 반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는 중세 시절의 종교적 유대인 학살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연관성이 없다고 반박합니다. 중세와 달리 20세기 유대인들은 일반 기독교인들과 전혀 구분이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두 지성의 저작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참고자료>

ㅇ중세의 소외집단(1999년), 제프리 리처즈 지음, 느티나무 펴냄

ㅇ중세의 빛과 그림자(2000년), 페르디난트 자입트 지음, 까치 펴냄

ㅇ낯선 중세(2018년), 유희수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네줄요약>

ㅇ중세 프랑스 왕 루이9세는 아돌프 히틀러처럼 유대인을 박해했다.

ㅇ가톨릭은 루이9세의 공적을 치하해 성인으로 시성했다.

ㅇ유대인 학살은 1000년 이전부터 이뤄졌고, 히틀러는 그 오랜 혐오의 결과물이었다.

ㅇ혐오와 정치가 만났을 때 언제나 비극이 일어난다.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