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만큼 무섭다”...1mm 크기 생명체에서 시작된 재앙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3. 1. 28. 09: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30일부터 실외에 이어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도 해제됩니다. 지난 2020년 10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로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화 이후 2년 3개월 만인데요. 어쩌면 올 봄엔 답답했던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벚꽃을 구경하며 와인 한 잔을 즐길 여유를 되찾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진자 6억7000만여명, 사망자 675만여명, 전세계를 할퀸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인류 역사에 깊고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아마 당분간 흑사병 이후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염병으로 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흑사병은 전세계에서 추정치 총 2억명, 가장 유행했던 3년여 동안 유럽에서만 2000만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내 인류 역사상 단기간에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남긴 전염병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는 저서 ‘데카메론(Decameron)’에서 흑사병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휘몰아치는 전염병 앞에서는 어떤 인간의 지혜도, 대책도 소용이 없었지요. 특별히 임명된 공무원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오물을 청소했고 병든 자들은 도시에 들이지 않았으며 수많은 위생 지침이 고시됐지만 다 헛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와인의 원재료가 되는 포도나무에도 인류의 흑사병과 비견되는, 아니 넘어서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있습니다. 오늘은 창궐 후 30여년 동안 치료제는 찾지도 못했고 덕분에 전 유럽 포도나무 3분의 2를 말라죽인 포도나무의 흑사병, ‘필록세라(phylloxera)’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죽음의 승리’. 역사상 가장 심각했던 전염병으로 알려진 흑사병을 묘사했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와인, 역사 유물로 남을 뻔 하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와인의 이야기 중 가장 충격적인 일을 꼽으라면, 아마 많은 와인러버들은 필록세라의 창궐을 꼽습니다. 와인을 양조할 때 원재료가 되는 포도나무가 아예 유럽에서 사라질 뻔 했거든요.

재앙은 언뜻 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1㎜ 내외의 이 작은 생명체로부터 시작됐습니다. 포도나무 뿌리의 수액을 빨아먹고 끝내 고사시키는 진드기인데요. 이 녀석의 공격을 받은 포도나무들은 뿌리에 혹이 생기고 수액이 말라 조직이 비틀어지다, 끝내 잎까지 누렇게 변하고 종잇장처럼 떨어지면서 말라죽습니다.

전염력도 어마어마했습니다. 죽은 나무를 떠나 부근의 다른 살아있는 나무로 이동하는 습성 덕분에 창궐 후 수십년간 죽은 나무에서 원인을 찾던 인간의 눈을 피할 수 있었고요. 암컷 한 마리가 수백개의 알을 낳는 엄청난 번식력까지 맞물리면서 들불 번지듯 유럽 포도밭 전역을 황폐화시켜 버렸습니다.

이런 광경은 불세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그림에서도 나타납니다. 아래 그림은 반 고흐의 1888년작 ‘아를의 붉은 포도밭(Red Vineyards at Arles)’인데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여느 포도밭과는 다르게 누렇고 주황이다 못해 붉기까지 한 강렬한 인상입니다.

재밌는 건 고흐의 활동 시기와 필록세라가 유럽에서 맹위를 떨치던 시기가 겹친다는 점 입니다. 고흐가 이미 필록세라에 황폐화된 포도밭을 보고 그린 것일 수도 있다는거죠. 고흐는 1853년 태어나 1890년에 사망했는데요. 필록세라는 1863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발생해 전 유럽으로 번졌습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린 1888년 무렵에는 프랑스 전역 포도밭의 64%가 필록세라에 초토화됐다고 합니다.

반 고흐가 1888년 그린 ‘아를의 붉은 포도밭’. 고흐는 그림을 동생 테오에게 줬다. <러시아 푸쉬킨 미술관 소장>
‘뿌리 접붙이기’로 겨우 찾은 해법
전 유럽 포도원을 30여년 간 공포로 몰아넣은 필록세라 퇴치법은 무엇이었을까요? 프랑스 당국에서는 해결법을 찾기 위해 30만 프랑을 현상금으로 걸었습니다. 696개의 해법이 제안됐고 갖은 방법이 시도됐죠. 약을 살포하는 기본적인 방안부터, 포도밭을 고의로 침수시키거나, 포도나무에 전기 쇼크를 가하고, 불을 지펴 훈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방법을 찾아냅니다. 유럽의 포도나무에 미국산 포도나무 뿌리를 접목시키는 것(접붙이기·Rootstock)이었습니다. 필록세라가 신대륙으로부터 건너왔다는 사실과 미 대륙 자생종 포도나무들이 필록세라에 강하다는 것에서 창안한, 당시로서는 매우 창의적인 방법이었죠.

하지만 당대의 상식을 뛰어넘는 방식은 때론 공격의 대상이 되거나 이유없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자존심 강한 프랑스 양조자들도 처음에는 이 방법을 탐탁치 않아했다고 합니다. ‘감히 유럽 품종에 신대륙의 검증되지 않은 포도나무 뿌리를 결합하다니, 혹시라도 품질이 떨어지게 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었죠.

실제로 품종 간 블랜딩이 기본인 보르도와 달리 단일품종 와인이 많이 양조되는 부르고뉴 등 일부 지역과 와이너리는 최대한 접목을 미루기도 했습니다. 와린이에게도 익숙한 DRC(도멘 로마네 꽁티·한 벌, 12병의 가격이 1억원이 넘는 초고가 와인)는 무려 1945년까지 접붙이기를 않고 버텼지만 결국 접붙이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필록세라와 포도나무. 지면에 가까운 뿌리 부근에 노란 점들이 필록세라가 주로 서식하는 곳이다. /그래픽=와인폴리
뒤집어진 와인 산업, 필록세라의 순기능
필록세라는 와인 산업을 넘어 주류 산업의 많은 것들을 바꿔놨습니다. 우선 유명무실해진 와인의 등급체계를 현대의 상황에 맞게 정교하게 재정립하는 계기가 됩니다. 와인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자 와인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결국 시장에 위조품이 판을 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유통업자들은 물을 섞거나 타국의 와인을 싼 값에 들여와 티나지 않게 섞는 방법을 썼고, 양조업자 사이에서는 아예 수입 건포도와 다른 과일을 섞어 모조 와인을 만드는 법까지 유행합니다. 실제로 1880년에 발간된 ‘건포도로 와인 만드는 기술’은 당시 베스트셀러였고, 건포도 와인은 1890년 무렵 프랑스 와인 소비량의 10%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시장이 엉망이 되자, 프랑스의 와인 생산자들과 정부는 프랑스 AOC(Appellation d’Orgine Controlee) 제도를 탄생시켰습니다. 오늘날 대부분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등급제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요.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와인의 품질과 원산지, 양조 방식에 대한 보증을 해주는 인증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 와인메이커들이 유럽을 떠나 다른 대륙에 포도원을 차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필록세라가 30년 가까이 치료제도 없이 지속되자, 많은 와인 메이커들이 그동안 유럽 대륙 내에서도 비교적 관심 밖이었던 크로아티아, 스페인 등으로 와이너리를 옮겼습니다. 아예 유럽을 떠나 칠레나 호주 같은 신대륙에 새롭게 와이너리를 차리기도 했죠. 덕분에 현대에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와인의 종류가 보다 다양해졌죠.

어쩌면 역사 속에서만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품종들을 지켜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호주의 쉬라즈, 칠레의 까베르네프랑, 아르헨티나의 말벡 같은 품종들은 필록세라를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가면서 필록세라를 피했습니다. 지금 유럽에서 생산되는 같은 품종들 중 일부는 신대륙으로 건너갔던 녀석들이 다시 돌아온 케이스기도 합니다.

와인의 생산량이 수십년간 급격히 떨어지면서 소비자들이 구하기 힘든 와인 대신 맥주, 꼬냑, 위스키 등 다양한 주류로 눈길을 돌린 것도 중요한 포인트 입니다. 결국 와인을 고사 직전까지 끌고 갔던 필록세라가 결국 주류 산업의 발전과 저변 확대에 중요한 영향을 한 셈입니다.

1890년 영국의 유머와 풍자 주간지 Punch에 소개된 필록세라 삽화. 여기에는 ‘진정한 미식가, 필록세라는 가장 좋은 와이너리들을 찾아내고 가장 좋은 와인에만 달려든다’라고 소개돼 있다. <출처=위키피디아>
필록세라, 여전히 존재하지만…
필록세라는 접붙이기로 영원히 박멸됐을까요?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여전히 매년 전세계의 와이너리에서 피해 사례가 여전히 보고되고 있습니다. 와이너리를 다니다보면 담장이나 포도나무 주변에 심어진 장미를 볼 수 있을텐데요. 이 장미는 필록세라 등 여러 병충해를 미리 예측하기 위해 일부러 심어놓은 겁니다. 병충해에 민감한 수종이어서 포도나무보다 먼저 변하거든요.

맹위를 떨치던 코로나19가 서서히 팬데믹에서 엔데믹 단계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백여년 전 필록세라처럼 코로나19도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겠지만, 예방과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예전만큼 무서운 병은 아닐 겁니다. 어쩌면 이제는 필록세라처럼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필록세라를 통해 주류 산업 자체가 한 차례 성장했던 것처럼, 우리도 분명 코로나19를 딛고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서두에서 언급한 데카메론은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 교외 별장에 모여든 10명의 남녀가 2주일에 걸쳐 10일 동안 매일 10개씩 총 100개의 이야기를 주고 받는 내용입니다. 절망이 가득한 시대에서도 긍정과 욕구를 잃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던 작가 보카치오가 흑사병 시대에 사랑과 욕망, 행복, 운명과 같은 인간의 주제를 산문의 형식으로 쉽고 친근하게 풀어낸 고전이죠.

데카메론의 첫 문장은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인간다운 일’입니다. 코로나19로 지친 독자님들의 마음에 와인프릭이 작은 위안이 되길 바랍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현직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