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만큼 무섭다”...1mm 크기 생명체에서 시작된 재앙 [전형민의 와인프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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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진자 6억7000만여명, 사망자 675만여명, 전세계를 할퀸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인류 역사에 깊고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아마 당분간 흑사병 이후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염병으로 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흑사병은 전세계에서 추정치 총 2억명, 가장 유행했던 3년여 동안 유럽에서만 2000만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내 인류 역사상 단기간에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남긴 전염병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는 저서 ‘데카메론(Decameron)’에서 흑사병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휘몰아치는 전염병 앞에서는 어떤 인간의 지혜도, 대책도 소용이 없었지요. 특별히 임명된 공무원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오물을 청소했고 병든 자들은 도시에 들이지 않았으며 수많은 위생 지침이 고시됐지만 다 헛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와인의 원재료가 되는 포도나무에도 인류의 흑사병과 비견되는, 아니 넘어서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있습니다. 오늘은 창궐 후 30여년 동안 치료제는 찾지도 못했고 덕분에 전 유럽 포도나무 3분의 2를 말라죽인 포도나무의 흑사병, ‘필록세라(phylloxera)’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재앙은 언뜻 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1㎜ 내외의 이 작은 생명체로부터 시작됐습니다. 포도나무 뿌리의 수액을 빨아먹고 끝내 고사시키는 진드기인데요. 이 녀석의 공격을 받은 포도나무들은 뿌리에 혹이 생기고 수액이 말라 조직이 비틀어지다, 끝내 잎까지 누렇게 변하고 종잇장처럼 떨어지면서 말라죽습니다.
전염력도 어마어마했습니다. 죽은 나무를 떠나 부근의 다른 살아있는 나무로 이동하는 습성 덕분에 창궐 후 수십년간 죽은 나무에서 원인을 찾던 인간의 눈을 피할 수 있었고요. 암컷 한 마리가 수백개의 알을 낳는 엄청난 번식력까지 맞물리면서 들불 번지듯 유럽 포도밭 전역을 황폐화시켜 버렸습니다.
이런 광경은 불세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그림에서도 나타납니다. 아래 그림은 반 고흐의 1888년작 ‘아를의 붉은 포도밭(Red Vineyards at Arles)’인데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여느 포도밭과는 다르게 누렇고 주황이다 못해 붉기까지 한 강렬한 인상입니다.
재밌는 건 고흐의 활동 시기와 필록세라가 유럽에서 맹위를 떨치던 시기가 겹친다는 점 입니다. 고흐가 이미 필록세라에 황폐화된 포도밭을 보고 그린 것일 수도 있다는거죠. 고흐는 1853년 태어나 1890년에 사망했는데요. 필록세라는 1863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발생해 전 유럽으로 번졌습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린 1888년 무렵에는 프랑스 전역 포도밭의 64%가 필록세라에 초토화됐다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 방법을 찾아냅니다. 유럽의 포도나무에 미국산 포도나무 뿌리를 접목시키는 것(접붙이기·Rootstock)이었습니다. 필록세라가 신대륙으로부터 건너왔다는 사실과 미 대륙 자생종 포도나무들이 필록세라에 강하다는 것에서 창안한, 당시로서는 매우 창의적인 방법이었죠.
하지만 당대의 상식을 뛰어넘는 방식은 때론 공격의 대상이 되거나 이유없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자존심 강한 프랑스 양조자들도 처음에는 이 방법을 탐탁치 않아했다고 합니다. ‘감히 유럽 품종에 신대륙의 검증되지 않은 포도나무 뿌리를 결합하다니, 혹시라도 품질이 떨어지게 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었죠.
실제로 품종 간 블랜딩이 기본인 보르도와 달리 단일품종 와인이 많이 양조되는 부르고뉴 등 일부 지역과 와이너리는 최대한 접목을 미루기도 했습니다. 와린이에게도 익숙한 DRC(도멘 로마네 꽁티·한 벌, 12병의 가격이 1억원이 넘는 초고가 와인)는 무려 1945년까지 접붙이기를 않고 버텼지만 결국 접붙이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유통업자들은 물을 섞거나 타국의 와인을 싼 값에 들여와 티나지 않게 섞는 방법을 썼고, 양조업자 사이에서는 아예 수입 건포도와 다른 과일을 섞어 모조 와인을 만드는 법까지 유행합니다. 실제로 1880년에 발간된 ‘건포도로 와인 만드는 기술’은 당시 베스트셀러였고, 건포도 와인은 1890년 무렵 프랑스 와인 소비량의 10%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시장이 엉망이 되자, 프랑스의 와인 생산자들과 정부는 프랑스 AOC(Appellation d’Orgine Controlee) 제도를 탄생시켰습니다. 오늘날 대부분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등급제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요.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와인의 품질과 원산지, 양조 방식에 대한 보증을 해주는 인증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 와인메이커들이 유럽을 떠나 다른 대륙에 포도원을 차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필록세라가 30년 가까이 치료제도 없이 지속되자, 많은 와인 메이커들이 그동안 유럽 대륙 내에서도 비교적 관심 밖이었던 크로아티아, 스페인 등으로 와이너리를 옮겼습니다. 아예 유럽을 떠나 칠레나 호주 같은 신대륙에 새롭게 와이너리를 차리기도 했죠. 덕분에 현대에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와인의 종류가 보다 다양해졌죠.
어쩌면 역사 속에서만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품종들을 지켜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호주의 쉬라즈, 칠레의 까베르네프랑, 아르헨티나의 말벡 같은 품종들은 필록세라를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가면서 필록세라를 피했습니다. 지금 유럽에서 생산되는 같은 품종들 중 일부는 신대륙으로 건너갔던 녀석들이 다시 돌아온 케이스기도 합니다.
와인의 생산량이 수십년간 급격히 떨어지면서 소비자들이 구하기 힘든 와인 대신 맥주, 꼬냑, 위스키 등 다양한 주류로 눈길을 돌린 것도 중요한 포인트 입니다. 결국 와인을 고사 직전까지 끌고 갔던 필록세라가 결국 주류 산업의 발전과 저변 확대에 중요한 영향을 한 셈입니다.
맹위를 떨치던 코로나19가 서서히 팬데믹에서 엔데믹 단계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백여년 전 필록세라처럼 코로나19도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겠지만, 예방과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예전만큼 무서운 병은 아닐 겁니다. 어쩌면 이제는 필록세라처럼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필록세라를 통해 주류 산업 자체가 한 차례 성장했던 것처럼, 우리도 분명 코로나19를 딛고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서두에서 언급한 데카메론은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 교외 별장에 모여든 10명의 남녀가 2주일에 걸쳐 10일 동안 매일 10개씩 총 100개의 이야기를 주고 받는 내용입니다. 절망이 가득한 시대에서도 긍정과 욕구를 잃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던 작가 보카치오가 흑사병 시대에 사랑과 욕망, 행복, 운명과 같은 인간의 주제를 산문의 형식으로 쉽고 친근하게 풀어낸 고전이죠.
데카메론의 첫 문장은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인간다운 일’입니다. 코로나19로 지친 독자님들의 마음에 와인프릭이 작은 위안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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