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아니면 ‘기술 유출?’ 그 위험한 경계…“미국에선 경제 스파이”

홍정표 입력 2023. 1. 2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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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 개요도(특허청 제공)


■ 끊이지 않는 'K-반도체' 기술 유출

잊을 만하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산업 기술 유출 문제. 이번에도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반도체 공정 관련 기술은 제조사 별로 영업비밀로 부쳐지는 것은 물론이고, 내용에 따라서는 기술적, 경제적 가치가 높거나 성장 잠재력이 높아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민 경제 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수 있어 '국가 핵심기술'로 지정되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우리나라 기업이 보유한 최고의 기술력이 몇몇 개인의 일탈로 인해 해외로 유출된 경우입니다.

이름만 대면 아는 대기업에 다니던 A 씨. 하지만 임원 승진 기회를 얻지 못하자, 정년을 앞두고 중국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A 씨는 2019년 6월쯤 자신의 경력과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 업체와 동업을 하기로 하고, 반도체 원료인 '웨이퍼' 연마 공정에 쓰이는 '연마제(슬러리)' 제조 사업에 뛰어들기로 하는데요. 회사에 다니면서도 메신저로 중국 측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연마제 생산 설비 구축을 돕고, 사업장을 관리하기 시작합니다.

웨이퍼 연마는 말 그대로 얇은 판 모양으로 잘라진 웨이퍼의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작업인데요. 그 위에 올려지는 집적회로의 정밀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공정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우리나라 기업들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반도체 산업이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것인데요.

그런데 A씨는 회사 내부망으로만 접속 가능한 반도체 웨이퍼 연마 공정도 등의 회사 기밀자료를 열람하면서, 개인 휴대전화로 촬영하는 방법으로 유출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발표 자료를 만들어 중국 쪽 직원들과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명백한 기술 유출 행위로, 산업기술보호법 위반과 부정경쟁방지법(영업비밀 국외누설) 위반입니다.


■ "연봉 3배"…'이직'과 '기술 유출'사이, 그 위험한 경계

그런데 이런 기술 유출에 A 씨만 가담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전 직장 동료인 B 씨 등 반도체 관련 대기업과 협력사 3곳의 전·현직 직원과 연구원 등 5명이 추가로 적발됐습니다.

이들은 주로 반도체 연마 공정을 관리하거나 연구하는 업무를 했었고, A씨와 교류하며 역시 회사 기밀 내용을 휴대전화로 촬영해 전달한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이 가운데 3명은 A 씨의 주선으로 중국으로 이직까지 했습니다.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으니, 더 나은 연봉 등을 제공하는 곳으로 이직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유출한 자료 가운데는 앞서 언급됐던 '국가 핵심기술'과 '첨단기술'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기술을 다루는 기업의 직원이나 연구원, 다행히 이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지켜보는 장치는 있습니다. 이번 사건도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로부터 중국 업체로 이직한 연구원 2명에 대한 첩보를 받아 특허청 기술경찰의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체포 당시에는 단순한 '이직'일 뿐 '기술 유출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지만, 스스로 촬영한 사진 파일들이 결정적 증거가 됐습니다. 더욱이 이들 외에도 A씨가 접근하거나 포섭하려 한 직원이나 연구원들이 더 있었지만, 기술 보안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법적 책임 등을 이유로 당당히 거절한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중국으로의 이직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중국으로 이직하면서 보장받은 더 나은 조건, 국내보다 2~3배 많은 연봉 등 여러 경제적 혜택은 위험한 경계를 넘는 대가였을 겁니다.

■ 5년간 112건 산업 기술 유출…처벌은 '솜방망이'

국가정보원 등의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해외로 산업 기술을 유출했다 적발된 경우는 112건 이릅니다. 이 가운데 36건은 '국가핵심기술'이었고요. 분야별로는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등 우리나라 주력 산업이 가장 많았고, 유출로 인한 직·간접적인 경제적 피해액만 26조 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번 사건도 가장 규모가 작은 기업 한 곳의 피해만 천억 원에 이르는데요. 기술이 유출되는 순간, 기술 확보를 위해 투자한 연구 비용은 물론, 시장 경쟁력이 떨어져 매출까지 타격을 입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업, 나아가 국가적인 손실이 막대한데도 정작 법원 판결은 미약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현행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은 핵심 기술을 해외로 유출했을 경우 3년 이상 징역과 15억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게 돼 있지만, 이마저도 처벌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상당수입니다. 대법원 사법연감 자료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21년까지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95명이 1심 재판에서 처리됐고, 이 가운데 실형을 받은 사례는 단 6명, 6.3%에 그쳤습니다. 대부분은 집행유예나 벌금형, 특히 3분의 1가량인 33명은 범죄에 대한 입증의 어려움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 미국에선 '경제 스파이'…"강력한 방지 대책 필요"

우리나라와 달리 해외에서는 기술 유출을 엄격하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엔 이른바 '경제 스파이법(Economic Espionage Act in USA)'을 통해 국가 전략기술을 해외로 유출하다 적발되면 간첩죄 수준으로 가중처벌을 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기술 경쟁국인 대만만 해도 핵심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해 '경제간첩죄'를 적용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관련법을 제정해 막대한 액수를 손해배상 청구하고 있습니다. '일벌백계'만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또 따른 유출 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현재보다는 강력한 처벌과 방지 대책이 필요해 보입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런 식으로 처벌이 약한 상황이라면, 일부 종사자들에게 '해외에 기술을 넘겨 많은 돈 벌고, 한 1~2년만 버티면 되는구나'라는 잘못된 인식까지 심을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국가 산업 경쟁력과 직결되는 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이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이유입니다. 기술범죄수사 지원센터를 개설해 기술 경찰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특허청에서 대법원 양형위원회 등에 현실을 반영해 형량 정비와 강화 등을 요청한 상황이라고 하니, 그 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첨단 산업 분야 기술 유출 문제는 단순히 기업의 생존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 산업 경쟁력은 물론 성장 동력까지 저해시킬 수 있는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번 유출되고 나면 사실상 회수나 복구나 어려운 만큼, 종사자들의 보안 의식 강화와 더불어 퇴직자 재고용과 전문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연계 일자리 창출 등 현실적인 지원책도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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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표 기자 (real-eye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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