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중국공산당이 아니라 중국의 민초(民草)가 주도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3. 1. 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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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64회>

<1992년 상영된 영화 “지평선 너머”의 한 장면. 집단노동을 거부하는 농민들이 모여서 자발적으로 토지를 분배하고 가구별 개별 영농으로 전환하는 안후이성 농촌 개혁에 근거한 영화다. 사진/공공부문>

농촌 개혁을 주도한 산간벽지 빈촌의 농민들

‘(······)1970년대 말 겨울 첩첩산중 외딴 마을 야오거우(窑沟村)촌. 열악한 환경인데다 극좌(極左) 풍조가 만연해서 마을 사람들은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 있다. 고향을 떠난 사내들은 객지에서 품을 팔고, 굶주린 여인들은 아이들을 내다 판다. 본래 그 마을의 지부(支部) 서기였던 취허우청(屈厚成)은 위급 상황에 대비해서 당원 몇 명과 몰래 산지를 개간했다. 그는 수천 근 양식을 수확해서 창고에 은밀히 비축해 두었는데, 온 마을이 굶주리는 상황이 닥치자 그 양식을 모두에게 나눠주려 했다. 바로 그때 마을에 들이닥친 신임 서기는 “흑지(黑地, 불법 개간지)에서 난 흑냥(黑糧, 불법 식량)”이라며 몰수를 선언한다. “굶주린 사람들이 죽 한 그릇 먹자는데 그게 무슨 자본주의냐?”며 항변했지만, 신임 서기는 양식을 빼앗아 상납한다. 다음날 절망에 빠진 마을의 사내들은 모두 산을 떠나는데, 취허우청은 누각에 올라서 큰북을 두드리며 그들의 발길을 돌려세운다. 급기야 18명의 당원 간부는 비장한 마음으로 정부 시책에 정면으로 맞서 극비리에 마을의 농지를 공평히 분배하여 맡은 땅에서 각자 농사를 짓는 이른바 “호별 영농”의 계약서에 나란히 서명하고는 선홍색 지장을 찍는다(······).’

1992년 상하이에서 제작하여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 <<지평선 너머(走出地平線)>>의 줄거리다. 시나리오를 쓴 루톈밍(陸天明, 1943- )은 이 작품의 의도가 마오쩌둥이 죽고 문화혁명이 막을 내린 후 “농민이 적극성을 발휘해서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말한다. 이 영화의 모태는 1978년 말 안후이 펑양(鳳陽)현 샤오강(小崗)촌에서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1978년 12월 안후이성 샤오강촌의 농민들이 직접 서명한 “호별 영농”의 서약서. 호별로 토지를 나눠서 개별적으로 농사를 짓고, 수확량 중에서 세금을 뺀 나머지 모두를 각자 가져가는 방식이다. 당시 엄격하게 금지된 영농 방식이라 농민들은 비밀을 맹세하고 구속자가 발생하면 그 자식을 18세까지 키워준다는 다짐까지 적었다. 사진/공공부문>

개혁개방 시기 중국의 농촌 개혁은 실제로 이 작은 마을에서 농민들이 극비리에 작성한 연명(聯名) 서약서에서 시작됐다. 궁핍에 찌든 농민들이 마오쩌둥의 엉터리 사회주의 정책을 폐기한 후 스스로 제 고장에서 농촌 개혁을 단행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윤 동기를 갖게 되자 농민들은 전통적 지혜를 되살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영농 기법을 발휘했고, 생산량은 전에 비에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소출량이 늘고 민생이 향상됐음에도 중국 각성의 지방정부들은 안후이성 방식의 농촌 개혁에 강하게 비판했다. 공산당은 그 방법이 사회주의에 반한다는 원론을 내세웠지만, 집단 영농으로 궁핍의 나락에 떨어졌던 농민들의 저항을 이길 수는 없었다. 중공 정부는 1982년 1월에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호별 영농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전국의 농민들은 비로소 불합리하고 강압적인 집단노동의 굴레를 벗고서 “열심히 일하면 더 많이 거둔다”는 자연의 법칙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흔히 망각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은 지도부의 설계도에 따라 단행된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인민의 요구로 아래로부터 시작된 경제적 자유화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질문이다. 개혁개방의 주체는 과연 누구였나? 정부였나, 인민이었나?

“덕분론(德分論)” 대 “불구론(不拘論)” 중국경제에 관한 두 가지 관점

1980-90년대 구소련과 동구의 과거 공산주의 정권이 줄도산하고 시장경제로의 전면적 이행을 시도했지만, 중국처럼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진 못했다.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한 오늘의 중국을 보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덩샤오핑 시대 중국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개혁개방 시기 중국공산당의 역할에 관한 학계의 평가를 보면 크게 “덕분론”과 “불구론”이 있는 듯하다.

“덕분론”은 중국공산당 “덕분”에 중국이 급속도의 대규모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국가주의적 설명(statist explanation)이다. “덕분론”에 기운 학자들은 흔히 중국공산당의 강력한 통치력, 효율적 정치제도, 우수한 당정(黨政) 간부, 적절한 국가 정책, 권위주의 통제에 따른 사회적 안정성 등이 중국의 개혁개방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설명한다. 독재 정권의 국가 정책이 개발도상국의 경제 성장을 견인한다는 국가 주도(state-led)의 권위주의 개발독재론이라 할 수 있다.

<1980-90년대 개혁개방을 추진한 덩샤오핑의 업적을 전시한 박물관. 사진/CNN/Yong Xiong>

“불구론”은 일당독재, 독단주의, 파벌 정치, 권력 부패, 정책 혼선, 인권 유린, 정치 탄압, 사회 통제 등 중국공산당 정부의 숱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중국경제가 성장했다는 이론이다. 1970-80년대 농촌 개혁도 궁핍한 농민들의 자구책에서 시작되었고, 1980년대 경제 성장의 추동력도 중앙 정부 정책이 아니라 지방 촌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이른바 향진(鄕鎭) 기업에서 나왔다. 오늘날도 중국경제의 견인차는 민간 부문이다. 중국경제에서 민간 부문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흔히 “60-70-80-90″의 조합을 말한다. 민간 부문이 국내 총생산량의 60%를 차지하고, 70%의 혁신을 성취하고, 80%의 도시 고용을 창출하고, 90%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낸다. 또한 중국의 민간 부문은 투자의 70%, 수출의 90%를 담당한다. 그 관점에서 보면, 개혁개방과 경제 성장의 주체는 민간 부문의 인민이고, 중국공산당은 오히려 경제 성장의 걸림돌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덕분론”에 기운 학자들도 민간 기업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고, “불구론”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국가의 역할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가의 업적과 민간의 성과 중 어느 쪽을 더 강조하고 핵심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양자의 입장은 극명하게 갈린다. “덕분론”에 기운 학자들은 중공 정부의 우수한 영도력과 통제 능력을 강조하면서 중국경제가 일당독재를 통해서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펼친다. “불구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중공 일당독재가 지속적 경제 성장을 저해하여 앞으로 중국경제는 “중간 소득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덕분론과 불구론 중에서 과연 어떤 이론이 더 실제 현실에 부합할까? 구체적 사례를 들어 분석할 수밖에 없다.

<“위대한 변혁.” 베이징 국립박물관 앞. 2018년 11월 개혁개방 40주년을 기념하는 대형 전람회가 개최되고 있다. 사진/Weibo>

향진(鄕鎭) 기업의 약진: 1980년대 “중국 특색 자본주의”의 발아(發芽)

안후이성 샤오강촌의 농촌 개혁 외에도 1980년대 향진 기업의 굴기는 개혁개방에서 인민의 역할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중대 사례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경제는 농촌 마을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향(鄕)과 진(鎭)의 소규모 기업들이 담당했음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농촌에 가면 요즘에도 농기계, 화학약품, 장난감 등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는 소규모 공장을 흔히 볼 수 있다. 농촌의 수로를 오염 물질로 뒤덮는 불결한 환경이지만, 그 어둡고 침침한 소규모 작업장에서 개혁개방 시기 경제 성장의 엔진이 굉음을 울리며 돌아갔다.

1980년 중국 전역의 향진 기업은 140만 개 정도로 3천만 명만을 고용했었는데, 1996년에는 그 수가 2천 340만 개로 늘어나서 1억 3천 5백만 명을 고용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1995년에 향진 기업은 중국 국내 총생산의 30%를 차지했으며, 그해 전국 산업 생산량의 절반에 달했다. 1978년에서 1995년까지 총생산량의 증가 폭은 평균 21%에 달했다. 1988년 향진 기업의 총수출액은 전체의 16.9%였는데, 1997년에는 무려 46.2%까지 늘어났다.

<1980년 광둥성 난하이(南海)구의 한 향진 기업. 사진/Xinhua>

1980년대 대다수 향진 기업은 형식상 농촌 공동체의 촌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하는 집체 기업이었다. 그 당시 비정부 부문의 기업체는 대다수가 집체 기업으로 등록되었다. 공기업적 외양을 취하고 있었는데, 자본주의라는 비판을 미리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1980년대 사영기업의 합법화는 여러 단계의 행정적, 법적 절차를 거쳐 가야만 험난한 과정이었다. 1982년 소규모 자영업이 먼저 합법화되었다. 1988년에야 사영 기업의 법적 지위가 인정되었지만, 수시로 정치 공세와 법적 차별에 시달려야만 했다. 겉으로만 집체 기업일 뿐, 실제로 소유양식이나 경영방식 면에서 대다수 향진 기업은 사영 기업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개혁개방이 개시된 후 1980년대 중국의 한 단면. 사진/Adrian Bradshw>

민간에서 향진 기업이 약진할 때 중국의 국유기업은 점점 쇠락의 길을 갔다. 정부 보조금과 은행 융자로 연명하던 다수 국유기업은 1990년대 적자를 내면서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1992년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외치면서 국유기업의 민영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98년부터 1,000여 개 대규모 국유기업의 민영화가 추진되었다. 국유기업 고용자 총수는 1978년 6천만 명에서 1992년 8천만으로 증가하지만, 2004년에는 3천만으로 줄었다. 1978년에서 2004년까지 50%의 고용자가 줄어든 셈이었다.

거시적 맥락에서 1980-90년대 향진 기업의 약진은 20세기 초 중화 대륙에 이미 뿌려졌던 초기 산업 자본주의의 씨앗이 비로소 꽃을 피운 결과라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초부터 중국에선 개항장 중심으로 초기 산업화가 시작되어 1930년대 무렵까지 견실한 성장세를 보였다. 1930년대 중국은 30만 외국인이 주재하는 국제적으로 “개방된 사회”였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외국의 다양한 지적 전통과 문예 사조를 열광적으로 흡수하며 신중국의 건설에 투신했다. 개혁개방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홍콩, 싱가포르, 대만,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대규모 화교 자본이 대륙으로 유입되었다. 붉은 제국 땅속에 박혀 있던 중국 전통의 상혼(商魂)과 기업가 정신이 다시 꿈틀꿈틀 살아났다고 할까.

<1980년대 중국, 쿠폰을 들고 줄을 서서 생필품을 구매하는 중국의 인민. 사진/ 공공부문>

중국 인민의 성취: 개혁개방의 역사적 의의

중국의 개혁개방은 마르크스주의 명령경제와 마오쩌둥의 혁명사상을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채택한 중국공산당의 과감한 정책적 양보(policy concession)에서 비롯됐다. 개혁개방은 무엇인가를 할 수 없게 금지하고 규제하는 “권위적/지시적 개혁(prescriptive reform)”이 아니라 과거에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일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용인하는 “허용적 개혁(permissive reform)”이었다. 개혁개방은 없던 규제를 새로 만들어서 공산당의 영도력을 강화하는 조치가 아니라 무수한 규제를 철폐해서 국가권력이 축소하는 과정이었다.

쉽게 말해서 중국공산당이 뭔가를 특별히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를 특별히 안 했기 때문에 억눌려 있던 중국경제가 비약적 발전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중국공산당이 특별히 안 한 그 ‘뭔가’란 무엇인가? 바로 인민의 사유재산과 경제적 자유를 철저히 박탈하는 생산수단의 공유화(公有化), 민간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는 경제적 집산화(集産化), 사적 공간과 사생활을 불허하는 집단화(集團化), 개별성을 말살하는 집체화(集體化), 인민을 분열시켜 계급투쟁을 부추기는 문화의 정치화(政治化), 상명하복의 군대식 질서를 확립하는 군사화(軍事化) 및 병영화(兵營化), 개인의 독창적 사유와 기업가적 상상력을 억압하는 이념의 획일화 등등······. 개혁개방 시기에 접어들면서 1950-70년대 중국공산당의 전체주의적 통제는 극적으로 완화되었다.

사유재산권의 보장, 시장경제의 도입, 외자 도입, 기업가 정신의 창달, 사영 기업의 활성화 등으로 민간 부문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중국에서도 급속한 경제 발전이 이뤄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중국공산당이 특별히 무엇인가 잘해서 중국경제가 살아난 게 아니라 엉터리 정책을 폐기하고 물러났기 때문에 중국의 성장 잠재력이 비로소 발휘될 수 있었다. 중공의 유위(有爲, activism)가 아니라 무위(無爲, non-action)가 압살 직전에 내몰렸던 중국의 경제를 되살릴 수 있었다. 그 점에서 지난 40여 년 중국경제의 놀라운 발전은 중국공산당의 영도 덕분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중국 인민의 성취였다.

<1986년 안후이성 허페이의 장마당. 당시 중국에 체류했던 영국의 사진작가 브래드쇼(Adrian Bradshaw)는 “농민들은 생산력만 좋으면 돈을 더 벌 수가 있었다. 거기서 새로운 경제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회고한다. 사진/Adrian Bradshaw>

덕분론보다 불구론이 설득력 있는 이유

결론적으로 최소 아홉 가지 이유에서 나는 “덕분론”보다 “불구론”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1980년대 이래 개혁개방의 주체는 기층 민중이었고, 오늘날 중국경제의 성장동력은 민간 부문에 있다는 점이다. 둘째, 역사적으로 중국공산당은 30년에 걸쳐서 “좌의 착오”로 경제적 파탄을 낳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바로 그 조직으로서 중국의 경제 발전을 후퇴시킨 중대한 과오를 범했으며, 1980년대 법제 개혁도 민간 부문의 변화를 뒤쫓아 갔다는 점이다.

셋째,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반자유적 사상통제와 이념 조작으로 개인의 창의성과 기업가 정신을 억압함으로써 중진국 경제에서 더욱 절실한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선진화를 가로막고 있음이다. 넷째, 중공 정부의 부패 구조는 중국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전을 왜곡하고 지체해 왔으며, 현재도 그러하다. 다섯째, 지속적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일당독재의 전체주의적 통제는 중국 인민의 삶의 질을 저하하는 요인이다. 일례로 중국은 1인당 GNP로는 세계 65위지만, 인간발달지수(HDI)는 78위에 머물러 있다.

여섯째, 현재 시진핑 정권 아래서 중국의 국제적 고립이 심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 일본, 독일, 캐나다, 미국 등 전 세계 주요국의 반중 감정은 현재 최고점에 달해 있다. 일곱째, 3년간 지속된 제로-코비드 정책을 하루아침에 180도 뒤집은 사례가 말해주듯, 중공 중앙의 예측불허 돌발 행정은 중국경제의 건전한 성장을 막는 ‘국가 리스크(risk)’로 작용한다.

<2022년 11월 29일, 뉴욕의 중국 영사관 앞에서 중국계 젊은이들이 모여서 제로-코비드 정책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AP>

여덟째, 중국의 국가 브랜드가 조사 대상이 된 세계 60개국 중에서 고작 33위로 폴란드, 브라질, 멕시코, 헝가리보다 낮다는 현실이다. 대외적으로 국가 이미지가 좋지 않기 때문에 세계 시장에서 “Made in China” 마크가 찍힌 상품은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다. 아홉째,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등 중국공산당의 절대 이념이 과도한 빈부 격차를 보이며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돌아가는 중국의 경제 현실과 근본적 모순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를 꼽다 보면, 지난 40여 년 중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이 중국공산당의 탁월한 영도력 덕분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에도 불구하고 이뤄진 민간 주도의 경제혁명이라는 해석이 더 타당하게 느껴진다.

혹자는 중국공산당이 확립한 정치제도의 효율성과 치리(治理) 능력을 높이 평가하지만, 정권이 바뀌어 반대 세력이 집정한 역사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중국공산당만이 14억 대륙을 다스릴 수 있다고 확언할 수 있는가? 만약 국민당 정권이 내전에서 승리해서 대륙을 다스렸다면, 현재의 중국보다 더 못 사는, 더 억압적인, 더 폐쇄적이고, 더 불량한 나라가 됐을까? 역사에서 가정이 무의미하다 해도 그런 질문을 던져볼 수밖에 없다.

중국공산당의 통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정권 교체로 반대 세력이 집권해서 중국을 통치하는 날이 와야 한다. 그래야만 사후 비교를 통해서 중국공산당 통치의 명암과 장단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가와 비판을 두려워하기에 중국공산당은 반대자를 숙청하고, 인민의 입을 막고, 통계를 조작하고, 군경을 내세워 영구 집권을 추구한다. “덕분론”은 본질적으로 중공 중앙선전부가 만들어낸 독재 정권의 독재 옹호론이다. 누구든 중국 인민의 편에 서서 개혁개방을 주도한 인민의 역할에 주목한다면, “불구론”을 부정할 순 없을 듯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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