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한 제 남편 용서해주세요" 아내가 호소한 까닭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성수영 2023. 1. 28.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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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미술 최고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
그의 탄생에 숨겨진 '기막힌 사연'
유럽 역사·미술사에도 영향
이번 기사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에 맞춰 바로크 미술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명작들을 하나씩 소개한다. 그림은 루벤스의 '사티로스와 소녀'. 술(와인)의 신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염소인간 사티로스가 소녀 옆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다. 사티로스는 색을 밝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내가 큰 잘못을 했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나 지금 너무 무서워. 일이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아마 나는 사형당할 것 같아.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도와줘….”

1571년 독일 서부의 도시 지겐. 남편이 보낸 편지를 읽는 아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립니다. 그 순간 지난 결혼 생활이 그녀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10여년 전 앤트워프(벨기에)에서 처음 만났던 초짜 변호사. 열정적인 눈빛과 재치 있는 입담이 매력적이었던 그 남자와의 행복했던 신혼 생활. 사업적·종교적 문제로 다투기도 했지만, 10년을 지지고 볶으며 큰 문제 없이 잘 살아왔습니다. 가톨릭이었던 종교도 남편을 따라 개신교로 개종까지 했습니다. 아이도 넷이나 있었고요.

그랬던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니. 그것도 네덜란드 최고 유력 귀족의 아내와 간통했다가 잡혀서 지하감옥에 갇혔고, 사형당할 날만 기다리는 신세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세상이 산산이 조각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거기서 죽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하고 싶지만…. 그녀는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 결단을 내린 듯 펜을 듭니다. 그리고 종이 위에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편지를 받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존경하는 공작님, 제 남편이 공작님께 죽을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중략)… 하지만 저는 남편을 용서했습니다. 저를 봐서라도 제발 제 남편 루벤스를 살려주시기를 간곡히 엎드려 빕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은 바로크 회화의 거장 피터르 파울 루벤스(1577~1640)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불륜 상대는 ‘네덜란드 독립 아버지’의 아내

루벤스의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그리스신화 속 일화를 바로크 미술의 최고 거장인 루벤스가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필치로 그려낸 이 걸작은 이후 같은 주제를 그린 그림들의 모범이 됐다. 이 그림이 지금 한국에 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에서 만날 수 있다,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두 사람, 루벤스의 어머니인 마리아 피펠링크스와 바람난 아버지인 얀 루벤스입니다. 이 양반이 바람피운 상대가 하필 네덜란드의 독립을 주도한 국가적 영웅의 아내이다 보니, 네덜란드 역사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네덜란드라는 ‘나라’의 역사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 지역은 원래 벨기에·룩셈부르크 등과 함께 묶여 ‘저지대’라는 지역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산이 없고 평탄한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중세부터 상업이 발달한 덕분에 이곳은 누구나 탐내는 돈 많은 동네였지요. 이들은 한 국가라기보다는 서로 붙어 있는 여러 독립 세력들의 모임에 가까웠고,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도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부르고뉴·14C),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15C), 스페인(합스부르크·16C) 등 여러 강력한 주변 세력의 지배를 받으며 휘둘리게 됐죠.

16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을 때만 해도 베네룩스3국은 이렇게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었다. /알렉시스 마리-고셰의 'Atlas de géographie physique'.


그래도 돈이 많으니 별 탈 없이 잘 지내던 이 지역.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선 넘은’ 착취에 마침내 각성합니다. 이곳 출신이었던 직전 왕과 달리 펠리페 2세는 현지에 와본 적도, 현지인들을 이해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책감 없이 세금을 왕창 올리며 이곳을 본국의 ‘빵셔틀’ 취급합니다. 돈을 뜯는 건 참는다 해도, 종교 탄압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펠리페 2세는 이 지역의 개신교도를 가혹하게 탄압하고 잡아 죽였습니다.

보다 못한 ‘네덜란드 독립의 아버지’ 오라녜(Oranje) 공작 빌럼이 1566년 반란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대귀족이었던 빌럼이지만 ‘무적함대’를 내세워 세계 최강자로 군림하던 스페인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번번이 전투에서 패배한 빌럼은 영지를 모두 몰수당하고 독일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한때 네덜란드에서 최고 권력을 자랑하던 귀족이었지만, 이렇게 수입이 뚝 끊겨버리니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살림살이가 어려우니 나라도 돈을 좀 벌어야겠다.” 빌럼의 아내 안나가 나섭니다.

파렴치한 불륜, 그리고 뜻밖의 용서

이 그림만큼은 루벤스 작품이 아니다. 네덜란드 화가 코르넬리스 크루서만이 그린 역사화 '침묵공 빌럼을 꾸짖는 펠리페 2세의 모습'(1832). 그림 속에서는 펠리페 2세(왼쪽)이 빌럼에게 삿대질을 하며 "반란이 일어난 건 네 탓"이라고 꾸짖고 있다.


당시 네덜란드 근처엔 빌럼처럼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영지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도망 나온 귀족이 넘쳐났습니다. 몸이라도 무사히 빠져나온 게 다행이긴 하지만, 급하게 챙겨 나온 귀중품과 돈은 다 써버린 지 오래.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처한 귀족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스페인에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 소송을 돕는 변호사 중 한 명이 얀 루벤스였습니다. 빌럼공처럼 얀 루벤스도 개신교도였고, 스페인의 압제에 분노해 정의감을 불태우고 있었지요.

잘나가는 변호사였던 얀 루벤스에게 안나도 소송을 의뢰합니다. 그리고 둘은 자주 만나면서 재정 문제를 비롯한 여러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그러다 눈이 맞아버렸습니다. 정신없이 ‘잘못된 만남’을 이어가던 둘, 급기야 안나가 얀 루벤스의 아이를 가지기에 이릅니다. 그제서야 빌럼도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립니다. “둘다 잡아와!”

루벤스가 성경 속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그린 '인간의 타락'.


1571년 콧노래를 부르며 평소처럼 안나를 만나러 가던 얀 루벤스. 난데없이 체포돼 빌럼 가문이 소유한 독일의 한 성 지하감옥에 수감됩니다. 안나도 곧 이혼당한 뒤 다른 감옥에 갇힙니다. 빌럼은 둘 다 살려둘 생각이 없습니다. 절망에 빠진 얀 루벤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조강지처의 얼굴이었습니다. 얀 루벤스는 염치도 없이 아내에게 “무섭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피펠링크스는 헌신적인 옥바라지를 시작합니다. 아이들을 비롯한 가족의 생존과 미래에 남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이혼을 금지하는 가톨릭 신앙을 따른 것인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인군자였던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녀는 남편이 갇힌 감옥 인근 도시인 지겐으로 이사를 했고, 빌럼을 비롯한 유력 귀족들에게 끊임없이 남편의 석방을 애걸복걸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저도 남편을 용서했다”면서요.

예상치 못했던 피펠링크스의 반응에 빌럼 공을 비롯한 귀족들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사실 그녀도 최대 피해자 중 한 명인데 말이죠. 피펠링크스가 집안 재산을 처분해 뿌린 돈도 귀족들의 마음을 꽤나 흔들었습니다. 결국 2년간의 노력 끝에 거액의 보석금을 내고 얀 루벤스가 풀려났습니다. 이후에도 얀 루벤스는 계속 가택 연금당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감옥에 갇혀있던 안나가 1577년 죽은 뒤에야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야기가 주는 네 가지 교훈

그 후 이야기는 교과서적인 권선징악 엔딩으로 달려갑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자화상(1623).


①용서의 힘은 위대하다. 안나가 죽은 해, 우리가 아는 거장 피터르 파울 루벤스가 태어났습니다. 피펠링크스가 구걸하다시피 노력해서 남편의 목숨을 살리지 않았다면, 루벤스의 인류 미술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도 탄생할 수 없었을 겁니다. 루벤스의 작품이 주요 소재로 나오는 ‘플랜더스의 개’도 없었겠지요.

애니메이션 '플랜더스의 개' 주인공 네로가 보고싶어했던 그림 중 하나인 '하늘로 올려지는 성모'.


인과응보. 좋은 일에는 좋은 결과가, 나쁜 일에는 나쁜 결과가 따른다. 죽다 살아난 얀 루벤스는 반쯤 폐인이 됐습니다. 감옥에서 건강이 많이 상하기도 했거니와, 아내와 자식을 비롯해 세상을 마주보기가 부끄러웠습니다. 피펠링크스는 남편을 대신해 이런저런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리고 피터르 파울 루벤스가 10살이 되던 1587년, 얀 루벤스는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최대 피해자 중 한 명인 빌럼은 안나와 이혼한 뒤 얼마 안 돼 좋은 짝을 찾아 재혼했습니다. 스페인과 싸움을 이어가던 빌럼은 1584년 암살당하지만,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자손들이 결국 1648년 독립을 쟁취합니다. 빌럼은 독립의 아버지로 대대손손 존경받게 됩니다. 오늘날 네덜란드의 상징색이 오렌지인 것도 그의 가문 상징색이 오렌지색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도 네덜란드 국왕은 빌럼의 가문 출신이고요.
애니메이션 '플랜더스의 개' 주인공 네로가 보고싶어했던 그림 중 하나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③최고의 복수는 잘 먹고 잘사는 것이다. 피펠링크스는 남편이 죽자 라틴어로 멋진 비문을 써줬습니다. “훌륭한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으며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엄청난 도량이지요. 딱 한 군데, 말속에 뼈가 있는 대목이 있긴 했습니다. “나는 7명의 아이를 낳았다. 모두 얀 루벤스로부터만.” 그리고 피펠링크스는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인 앤트워프로 돌아간 뒤 종교를 도로 카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그리고 홀몸으로 아이들을 잘 키워냈지요.
루벤스의 '마르세유에 도착하는 마리 드 메디치'. 이탈리아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 출신의 마리 드 메디치 프랑스 왕비가 고향을 떠나 프랑스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하는 장면을 표현했다. 소문의 여신과 바다의 신, 요정들이 배를 수호하며 왕비를 축복하고 있다. 루벤스는 이처럼 화려하고 과장된 표현을 통해 왕족들의 권위를 치켜세우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아들인 루벤스는 아버지와 정반대의 길을 갔습니다. 아버지는 개신교도였지만, 루벤스는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목숨 걸었던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성향의 그림을 그렸고, 아버지가 혐오했던 가톨릭 군주들의 권위를 높여주는 그림들을 그려주고 떼돈을 벌었습니다.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가톨릭 국가들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기도 했고요. 개인적인 생활도 아버지와 반대였습니다. 항상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에 충실했습니다.
'인동덩굴 숲에서 이사벨라 브렌트와 함께 있는 자화상'(1609~1610). 인동덩굴의 꽃말은 '꿀맛 사랑'으로, 신혼 시절 루벤스와 아내의 아름다운 사랑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둘은 손을 꼭 맞잡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루벤스를 바로크 미술 최고 거장으로, 피펠링크스를 루벤스의 위대한 어머니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얀 루벤스는 형편없는 불륜남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마지막 교훈입니다. ④용서 구할 일은 처음부터 하지 말자.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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