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직격탄 날린 ASML CEO "중국은 결국 해내고 말 것" [강경주의 IT카페]

강경주 2023. 1. 28.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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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주의 IT카페] 68회
피터 베닝크 CEO "미국 조치 여러 혼란 야기"
대(對) 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합의로 ASML 타격
공동연구로 성장한 ASML, 미국의 보호무역에 반기?
"ASML 대응따라 글로벌 반도체 지형 변곡점 올 수도"
"만약 그들(중국)이 (반도체)장비를 구할 수 없다면 스스로 개발할 것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들은 결국 해내고 말 것."
지난 25일(현지시간)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가 네덜란드 펠트호번(Veldhoven) ASML 본사에서 진행된 미국 경제전문매체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숨통을 끊기 위한 수단으로 장비를 지목하고 반도체 장비 강국인 네덜란드와 일본에 연합 전선을 압박하는 것에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는 분석이다. 이 3국이 대(對) 중국 수출 통제에 합의했다는 외신 보도까지 나오면서 ASML과 미국의 '불편한 동거'가 두드러지는 모양새다.

美, 네덜란드, 日 수출 막으면 중국은 장비 공수 못해

베닝크 CEO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 주도의 보호무역 움직임을 정면 비판했다. 그는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외국 장비 구매를 희망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스스로 개발할 것"이라며 "중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할수록 그들은 ASML에 필적할 만한 장비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반도체 생산 비용 상승도 언급했다. 그는 "미국의 과도한 통제가 칩 제조사의 비용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여러 혼란을 야기해 반도체 산업의 효율성과 혁신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진=블룸버그 홈페이지 캡처


ASML은 독점 생산하는 극자외선(EUV·Extreme Ultraviolet) 노광장비를 2019년부터 네덜란드 정부의 불허로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고 있고, 구세대 장비인 심자외선(DUV·deep ultraviolet) 노광장비만 공급 중이다. 베닝크 CEO는 인터뷰에서 수출 규제와 관련해 "정부와 정치인들이 계속 대화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에 이르기를 기다려야 할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상황은 녹록지 않다. 블룸버그는 26일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과 네덜란드, 일본 당국자들이 워싱턴DC에서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에 대해 협상 중이며 곧 최종 합의에 이를 것이라고 보도했다. ASML의 중국 수출 규제가 더 강화돼 DUV 장비까지 묶이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네덜란드와 일본에 수출 통제를 압박한 건 3국이 글로벌 반도체 장비 시장을 꽉 잡고 있어서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반도체 장비 시장 점유율은 미국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가 18.6%로 1위, ASML이 18.1%로 2위다. 미국 램리서치와 일본 도쿄일렉트론은 각각 점유율 15%, 13.4%로 3, 4위다. 미국, 네덜란드, 일본이 수출을 막으면 사실상 중국의 반도체 장비 공수는 불가능해진다.

협력과 개방이 ASML 상징인데…

미국과 일본은 '극중(克中)'이라는 공통 분모 아래 협상이 수월했지만 중립을 유지해온 네덜란드는 수출 통제에 신중을 기했다. 미국이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하자 마지못해 연합 전선에 발을 담그긴 했지만 베닝크 CEO의 강성 발언에 네덜란드의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는 평가다. 업계에서는 차분하고 합리적 성향의 베닝크 CEO가 이 같은 발언을 한데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베닝크 CEO는 지난 25일 지난해 4분기 실적발표 후 중국 수출이 2021년 21억7000만 유로(한화 약 2조9200억원), 2022년 21억6000만 유로(약 2조9000억원)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도 "거의 같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히 지난해 중국 수출이 ASML 전체 매출의 15%를 차지했고 전체 수주잔고인 400억 유로(약 53조7000억원) 가운데 15%가 중국향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으로 읽힌다.

매출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중국을 겨냥한 미국 주도의 보호무역이 오픈 이노베이션(내부 기술과 자원을 외부로 공유하는 것)과 자유무역, 공동연구, 협력이라는 ASML 특유의 문화와 정면 배치된다는 점이다.

ASML은 1984년 네덜란드 전자업체 필립스와 반도체 장비업체 ASM인터내셔널(ASMI)의 '합작' 벤처가 모태다. 첫 사무실은 에인트호벤의 허름한 공단 내 물이 새는 목재 창고였을 정도로 시작은 초라했다. 경쟁력 없던 ASML이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마에슈기(じまえしゅぎ)'로 알려진 일본 특유의 자전주의(폐쇄적 개발방식), 순혈주의와 달리 모든 걸 공개하고 받아들이는 개방성과 협력을 우선시한 기업 문화 덕분이었다.

캐논과 니콘이 독자 광학 기술을 갖춘 반면 ASML은 광학 기술도 없었고 존재감도 미약했다. 그럼에도 ASML은 개방적 연구를 통해 소자 업체, 대학, 연구소, 타 기업 간 공동 연구를 꾸준히 확대했다. 단적인 예로 ASML 대부분의 연구 논문 저자들이 다수 기관 소속인 반면 캐논과 니콘의 논문은 거의 내부 연구원으로만 구성된 게 특징이다.

수백 개 기업·기관과의 강력한 협업은 ASML의 혁신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ASML이 만드는 EUV 장비 한대의 무게는 180t, 높이는 4~5m에 달한다. 대형버스 크기의 이 장비에 들어가는 부품은 총 10만개, 협력사는 900여곳에 이른다. 교류와 협력, 자문, 이해, 공동연구는 ASML의 정체성 그 자체인 셈이다.

ASML과 위치가 가깝고 관계도 끈끈한 유럽 최대 종합반도체 연구소 IMEC 역시 협업을 통한 혁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IMEC에는 90여개 국가의 다수 기관에서 연구진이 파견돼 공동 비용을 부담하고 공동 연구를 진행하며 기술 개발 결과도 서로 공유한다. ASML은 노광기 개발에 필요한 레이저, 광학기술, 기계, 소프트웨어 개발 등 IMEC에서 다수의 기업과 협업했다. 반도체의 미래가 협력과 공공성에 있다고 믿는 ASML로서는 미국의 조치들이 연구 방해 수준을 넘어 위협으로 인식됐을 것으로 보인다.

"규제로 발전 막는 건 성공 가능성 크지 않아"

유럽의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독보적 기술을 가진 ASML이 향후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글로벌 반도체 지형에 변곡점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며 "일본은 반도체 경쟁력이 없어서 미국 편에 서지만 외교 리스크도 적고 세계 최고 기술력도 갖춘 네덜란드는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이 한국에 반도체 핵심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수출 통제 조치를 단행했을 때 삼성전자는 오히려 우회로를 찾고 대체재를 모색해 더 발전했다"며 "각종 지원으로 기술 격차를 벌려야 하는데 규제와 제재로 경쟁국의 발전을 막겠다는 건 성공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6월 네덜란드 ASML 본사에서 피터 베닝크 ASML CEO와 협력 방안을 논의한 모습 /사진=삼성전자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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