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천년서고에서 ‘눕독’ 해보니…오랜 여유의 감각이 [ESC]

한겨레 2023. 1. 2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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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커버스토리]커버스토리ㅣ겨울 박물관·도서관 여행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내부 전경.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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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티엑스(KTX) 경부선을 타고 서울에서 2시간10분. 신경주역에 도착했다. 지난 17일 오전, 평일인데다 학생들은 마침 방학 중이니 경주에 하차하는 승객이 드물 것이라 예상했지만 오산이었다. 와이어리스 이어폰을 귀에 쏙 넣은 채 작은 여행 캐리어를 끌고 바쁘게 걷는 청년들이 역 앞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줄지어 향한다. 경주의 여러 중심지로부터 떨어진 곳에 있는 신경주역에서는 목적지가 어디든 택시와 버스,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이번에는 들뜬 여행자들 무리에 섞여 여행 온 기분을 돋우기로 했다. 각자 캐리어를 동반한 여행객들로 빈 버스는 금세 만원이다. ‘골목길 경제학자’로 불리는 모종린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가 말했듯 각자의 활동 범위를 좁혀야만 했던 시절이 남긴 것 중 하나는 남녀노소 불문 국내 로컬 여행지 탐색에 열렬히 나서게 했다는 점이다. 일상이 소중해진 만큼 로컬에 대한 애정은 커졌고 엠제트(MZ)세대 사이에선 지역 탐구가 대세로 떠오른 지 오래라는 사실, 전국에서 가장 ‘힙’한 골목 중 하나가 된 경주 황남동 ‘황리단길’의 유명세를 신경주역에서 출발한 만원버스에서 실감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국립경주박물관. 궁금한 도서관이 그곳에 새로 문을 열었다. 경주박물관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 속 작은 서고에 누워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이른바 ‘눕독’(누워서 책 읽기) 가능한 도서관이라는 소식에 마음이 동했다.

불탑 형식 빌린 이색적 공간

두대의 버스를 이어 타고 국립경주박물관에 도착했다. 겨울 여정이니 수학여행단과 소풍 인파는 피했지만 그럼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박물관 앞 탁 트인 정원을 거닐고 있다. 가족과 연인, 친구들과 어울려 온 청년들 무리는 물론이고 단출한 차림으로 혼자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보인다.

신라역사관 외관.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정문을 지나면 바로 마주하게 되는 신라역사관은 신라 1000년 역사를 담아내는 주요 상설 전시관이다. 근래 엠제트세대 사이에서 ‘인스타그래머블’한 공간으로 입소문을 탄 바로 그 장소이기도 하다. 독특한 지붕 장식과 대들보를 받치도록 세운 열주가 신선한 미감으로 다가오는 건물은 건축가 이희태(1925~1981)가 지었다. 신라역사관의 지붕 끝은 하늘 방향으로 살짝 들어올려져 산뜻한 곡선을 그린다. 이는 황룡사 9층 목탑의 상부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진다. 신라역사관을 전체로 보면 불탑의 형태를 닮았고 기둥의 윗부분에는 연화 무늬가, 회랑의 난간에는 이조백자 중 입호의 형태가 적용됐다.

한국 현대건축에서 전통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근현대 박물관이 건립되던 때다. 당시 문화와 유산을 품는 건물 설계에 전통 건축요소를 고민하는 일은 필연적이었다. 혜화동성당(1958), 국립공주박물관(1971), 국립극장(1973), 절두산순교성지(1967), 부산시립박물관(1978) 등을 설계했으며 ‘건축계의 이단아’라 불리기도 한 이희태 역시 이 시기의 건축가다. 그가 전통을 해석하고 계승하는 방식을 고민한 흔적이 신라역사관에 담겨 있다.

신라미술관에서 본 정원 풍경. 이경진 제공

잘 가꿔진 정원과 각기 다른 시대에 증축된 낮은 높이의 건물들 사이를 걷고 있으니 기분이 금세 포근해진다. 경주박물관의 너른 정원에는 경주 일대의 절터나 궁궐터에서 발견된 석탑과 석등 등 석물이 곳곳에 펼쳐졌다. 그중에는 고선사터 3층 석탑 같은 유명 유물도 있지만 특별한 이름 없이 자리한 석물들도 있는데, 괜스러운 호기심에 유명 유물보다 더 열심히 살펴보게 된다. 박물관은 관람객을 함께 탐구하는 입장으로 초대하며 한층 여유롭게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공간이다. 허락된 시간을 모조리 쓰며 탐색하게 된 경험,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박물관이 품은 천년의 역사에 귀 기울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여유의 감각 아닐까.

오늘의 목표인 도서관과 어서 마주하고 싶어 금령총 유물을 엮은 특별전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로 기울어지는 마음을 잠시 접고 신라천년서고로 향해본다. 신라역사관과 성덕대왕신종 사이를 지나 월지관(안압지관)을 향해 걸어본다. 1982년에 건축된 월지관은 인근의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품고 있는 전시관. 월지관을 마주하면 박물관이 또 다시 다른 얼굴로 느껴진다. 짙은 색채의 폭 좁은 벽돌 타일을 촘촘하게 붙여 만든 외관을 보자 곧장 떠오르는 이름, 바로 건축가 김수근이다. 김수근은 전통 창고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 건물을 설계했다고 한다. 이희태의 신라역사관과 이웃한 장면에서 느껴지는 대비가 사뭇 인상적이다.

폭 좁은 벽돌 타일을 촘촘하게 붙어 있는 월지관 외관. 이경진 제공

완벽하지 않은 석등의 매력

월지관의 뒤편, 고청지와 수묵당을 돌아 내려간다. 그곳에 신라천년서고가 있다. 과거 수장고였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도서관이다. 외관은 거의 손대지 않고 내부 위주로 매만졌는데, 들어서니 바로 천장부터 보인다. 기둥, 보, 동자주, 서까래로 이어지는 전통건축의 목구조 형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미감이 압도적이다. 공간에 들어선 사람이 대부분 시지각적으로 인지하는 일반적인 경계를 확장시키는 디자인의 힘. 서가와 서가가 겹겹이 이어지는 책풍경이 실현된 작은 도서관에서 도서관에 관한 인간의 건축적 가 읽힌다.

설계는 김현대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와 텍토닉스랩 건축사사무소가 맡았다. “2022 국립경주박물관 전체 마스터플랜을 이화여대 용역으로 진행한 인연이 이번 도서관 프로젝트로 이어졌습니다.” 신라천년서고 리모델링 관련 업무를 담당한 김대환 국립경주박물관 교육문화교류과 학예사가 말했다.

“1945년 출발해 1975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며 다시 터를 잡은 국립경주박물관은 오래된 전시실을 보유하고 있다 보니, 관람객 입장에서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부족했습니다. 신라천년서고는 도서관이라면 지니고 있어야 할 성격과 기능을 유지하면서 관람객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는 취지에서 시작하게 됐어요. 쉬기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경주 유적 여행의 특별한 플랫폼 역할도 할 수 있길 바랐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에서 관람객이 책을 보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많은 유물을 보유하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이 중앙박물관과 차별화되는 면이 있다면 바로 해당 유물이 출토된 곳, 유적으로의 연결이 바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가깝게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야경으로 유명한 동궁과 월지가 도보로 4분, 황룡사지구가 15분, 첨성대는 20분이다. 천마총과 금관총 그리고 황남동의 경리단길로 불리는 골목 ‘황리단길’도 30분가량 걸으면 닿을 수 있다. 경주는 뚜벅이들에게 썩 괜찮은 여행지다.

“도서관이 된 옛 수장고 건물은 1970년대에 지어진 그 시절 관급 건축물이 그러하듯 건축적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역사성을 유지하고자 했어요. 동시에 전시실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정보들을 접하는 공간이 되길 바랐습니다. 정말 ‘눕독’ 해도 되느냐고요? 물론이죠. 저도 주말마다 이곳에서 아주 편안한 시간을 오랫동안 보내고 있습니다.”

‘눕독’ 할 수 있게 마련해둔 소파에 앉으면 커다란 창을 통해 박물관의 외부 전경을 조망하거나 건물의 뒤편에 조성된 대나무 숲을 바라볼 수 있다. “편안한 감각으로 다가가기 위해 일부러 공간을 많이 비워놓았습니다. 수장고일 때는 차고 어두운 느낌이었는데, 일부러 창을 더 많이 내서 채광이 잘 드는 따뜻한 장소로 완성했습니다.”

큰 창을 낸 신라천년서고 내부. 이경진 제공

김대환 학예사와 신라천년서고의 실질적인 운영자인 사서, 건축가가 기획 단계부터 서로의 제안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며 협업한 결과, 서고는 이 공간의 탄생에 관여한 각 주체가 흡족한 공간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계획에 없던, 현재 신라천년서고의 얼굴과도 같은 존재가 된 석등이 등장했다. 채광을 위해 창을 새로 내던 중 건물 뒤의 대숲을 발견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대숲의 모습을 담아낸 창을 보니 그 앞에 어떤 오브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물관 내·외부 석재들 중 석등 하나를 들이게 됐어요. 예쁘고 비례가 좋은 석등은 아닙니다. 박물관 내 가장 유명한 석탑인 고선사탑 옆 한편에 자리했던 석등인데, 관람객 대부분의 관심은 고선사탑을 향할 뿐이었고 시선을 그리 받지 못했던 석등이죠. 규모나 공간감 면에서 가장 잘 어울릴 법한 것으로 골랐는데 오히려 건축가가 이토록 촘촘하게 제안한 디자인 안에 비례는 좀 맞지 않아도 나름의 여유가 있는 석등을 두면 매력이나 차별성 면에서 배가될 거라 판단했습니다.”

김대환 학예사의 의도는 적중했다. 석등은 신라천년서고에 한층 분명한 인상을 선사한다. 서가는 오랜 역사를 지닌 경주박물관이 긴 시간 소장하고 있던 장서들 중 신라와 경주에 관한 서적과 세상의 모든 도록을 모아보자는 목표로 꼼꼼히 마련한 국내외의 전시 도록들을 필두로 진행 중인 특별전을 주제로 구성한 북 큐레이션 코너로 이루어진다.

금령총 유물 특별전 전시품. 이경진 제공
금령총 유물 특별전 전시품. 이경진 제공

여유롭게 만끽한 당일치기 여행

금령총 유물을 선보이는 특별전 관람을 앞두고 북 큐레이션 코너에 비치된 전시 도록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를 골라 기분에 알맞은 적당한 자리를 찾아본다. 겨울의 정취가 담긴 큰 창으로 따뜻한 볕이 들자 언 몸이 서서히 녹았다. 그 덕에 기세를 몰아 기다란 소파에 숫제 몸을 눕혔다. 씨실과 날실이 엮인 듯 구조적인 천장이 시야를 가득 메우자, 건축가와 큐레이터 그리고 사서가 함께 고민한 이 서가의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더욱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당일치기 경주 여행을 계획하며 살짝 벌린 일상의 틈새에, 박물관이 오랜 세월 품어온 여유의 감각이 진하게 스며들었다.

겨울 실내 여행지로 좋은 박물관∙도서관 여행

의정부음악도서관

감각적인 음악 전문 도서관. 의정부시의 문화적 특색을 반영해 흑인음악을 테마로 공간을 디자인했다. 가족과 개인 대상으로 사서와 함께 하는 이색적인 투어 프로그램을 추천한다. 하이엔드 오디오 스피커로 영화 오에스티(OST)를 듣고 스타인웨이 자동 피아노가 들려주는 연주도 감상할 수 있다.

온양민속박물관

1978년에 문을 연 사립 민속박물관인 온양민속박물관은 사계절이 아름답다. 박물관 앞 너른 정원에 가득한 나무, 장승, 비각을 비롯해 ‘바람의 건축가’ 고 이타미 준이 지은 구정아트센터 등 보고 느낄 것이 차고 넘친다. 박물관 옆에 지은 작은 가게 ‘카페 온양’까지 들르면 완벽한 한나절을 보낼 수 있다. 전통 민속 자료에 국한하지 않고 동시대적 기획전시와 프로그램을 통해 일상 속의 예술과 공예를 새롭게 펼쳐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계묘년맞이 ‘토끼를 찾아라’전에서는 통일신라관, 조선관, 서화관을 비롯해 지난해 11월 말 재개관한 청자실에 이르기까지 상설관 곳곳을 누비며 다양한 유물 속 토끼를 찾아보는 계묘년 특별전이 펼쳐진다. 아이와 함께하는 가족 단위 관람객에게 추천.

전남도립미술관

마감이 임박했지만, 1월29일까지 개최되는 조르주 루오 특별전 <인간의 고귀함을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는 놓치기 아까운 전시다.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과 조르주 루오 재단의 협력으로 성사된 대규모 회고전이다. 마티스,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전반의 미술을 대표하는 조르주 루오는 야수파, 입체주의, 표현주의 시대를 살며 그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일궜다. 인간성 부재의 시대에 인간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온양민속박물관 구정아트센터 내부. 온양민속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백자 청화 토끼 모양 연적.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경진 엘르 데코 디렉터 겸 엘르 피처 에디터 jin.rhi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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