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과학용어] 나노 기술

최정석 기자 2023. 1. 2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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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와 TSMC 반도체 기술경쟁의 핵심
회로 크기 줄여 정보량 획기적으로 증대
코로나 백신의 유전자 전달체에도 적용
온실가스를 유용물질로 전환, 온난화도 해결
첨단 반도체 공정에 사용하는 12인치 웨이퍼. /TSMC

“새끼손톱보다 작은 옷핀 머리에 24권짜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내용을 전부 써넣을 수 있을까요?”

1959년 12월 29일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칼텍)에서 진행된 한 강연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1768년 처음 발간된 세계 최고(最古) 백과사전입니다. 50만개가 넘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4000만개가 넘는 영어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 방대한 내용을 옷핀 머리에 전부 써넣는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어리둥절한 청중을 향해 강연자가 말을 잇습니다.

“일반적인 옷핀 머리 면적을 2만5000배 확대하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체 페이지 면적과 같아집니다. 그말인즉슨,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들어간 글자 크기를 2만5000배 축소하면 옷핀 머리에 그 내용을 전부 써넣을 수 있다는 것이죠.”

자칫 허무맹랑하게도 들릴 수 있는 이 이야기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차드 파인만 칼텍 교수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이날 그가 진행한 강연 제목은 ‘바닥에는 풍부한 공간이 있다(There’s Plenty of Room at the Bottom)’였죠. 옷핀 머리에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내용을 써넣을 공간이 충분하다 못해 풍부하다는 얘길 하고 싶었던 걸까요.

파인만이 옷핀 머리 다음으로 꺼낸 이야기는 생명체의 유전정보가 담긴 DNA였습니다. 그는 “눈동자 색깔이나 턱 뼈 모양을 비롯한 생김새는 물론 몸을 움직이는 방식, 생각하는 방법과 같은 모든 정보들이 DNA에 기록돼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 안에 담긴다”며 “이처럼 막대한 정보를 매우 좁은 공간에 기록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삶이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을까”라고 물었습니다.

IBM이 만든 초기 컴퓨터 저장장치 'RAMAC'. 용량은 5메가바이트 수준이다./Online Archive of California

◇30t 컴퓨터를 가방 크기로 줄인 나노 기술

파인만의 이야기는 시대를 앞선 선경지명이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쓰던 초기 컴퓨터 ‘에니악’은 무게만 30t을 넘었습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 컴퓨터는 서류가방에 들어갈 정도로 작고 가벼워졌습니다. 드럼통 만한 저장장치에 고작 5메가바이트(500만바이트) 용량의 정보만 저장할 수 있던 때를 지나 이제 손바닥 크기 칩에 몇 테라바이트(1조바이트)씩 자료를 넣을 수 있게 됐습니다.

파인만의 아이디어는 ‘하향식 나노기술 연구방법론’의 초석이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향식 나노기술 연구방법론이란 기존 제품보다 크기를 줄이면서 비슷하거나 더 좋은 성능을 내게끔 개선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삼성을 비롯한 전 세계 반도체 회사들이 조금이라도 더 작은 칩을 만들기 위해 나노미터(㎚, 1㎚는 10억분의 1m) 단위에서 경쟁하는 게 바로 그 사례입니다.

전문가들은 나노 기술이 컴퓨터 분야를 넘어 디스플레이, 2차전지, 제약·바이오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노 기술이 산업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래서 나노가 뭔데’라고 물었을 때, 간단명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조선비즈는 도대체 나노가 뭔지, 그리고 나노 기술이 우리 일상과 미래를 어떻게 바꿔나갈지 박종구 나노융합2020사업단장과 함께 알아봤습니다.

주사터널링현미경 IBM100. /IBM

◇반도체 기술 경쟁의 핵심으로 부상

나노는 그리스어로 난쟁이를 뜻하는 단어 ‘나노스(Nanos)’에서 유래한 말로, ‘10억분의 1′을 뜻합니다. 1나노미터 10억분의 1미터입니다. 나노가 뭐냐고 물었을 때 10억분의 1이라고 답한다면 얼추 정답에 근접한 겁니다. 1나노미터는 머리카락 굵기의 약 10만분의 1입니다. 1~100㎚ 크기 물질을 나노물질이라 부르고 이러한 나노물질을 조작·융합해 새로운 소재나 소자를 만드는 게 나노 기술입니다.

나노 기술은 나노물질을 탐지할 수 있는 장비가 개발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했습니다. 1981년 IBM 취리히 연구소 소속 물리학자인 게르트 비니히와 하인리히 로러가 개발한 ‘주사터널현미경(STM)’이 그 시작이었죠. 주사터널현미경을 쓰면 0.1㎚ 정도 크기인 원자를 하나하나 관찰하며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비니히와 로러는 이 장비를 만든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습니다.

나노 기술이 적용된 가장 대표적인 산업 분야가 바로 반도체입니다. 삼성전자와 TSMC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나노미터 단위에서 반도체 생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6월, 대만 업체인 TSMC는 12월에 3나노 반도체 양산을 시작하며 각축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반도체가 처음부터 나노 단위로 작았던 건 아닙니다. 1971년경 인텔을 비롯한 반도체 회사들이 10마이크로미터(1만㎚) 크기 반도체 양산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소형화 경쟁이 시작됩니다. 이후 미국과 일본 반도체 회사들이 1987년 800㎚ 양산을 시작하며 반도체 소형화 경쟁이 처음으로 나노 단위까지 넘어옵니다.

세계 10대 반도체 첨단 후공정 기업 중 한 곳으로 꼽히는 네패스 기술이 적용된 칩. / 네패스

반도체 기업들이 반도체 크기 줄이기에 혈안이 돼있는 건 반도체 크기가 컴퓨터, 스마트폰 등 전자제품 성능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크기의 전자회로 기판에 반도체 소자가 더 많이, 촘촘히 배치돨수록 더 많은 정보를 적은 전력으로 훨씬 빠르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반도체 크기가 작아질수록 정보 전달 효율이 급격하게 높아지는 겁니다.

디스플레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발광다이오드(LED) 크기가 작아질수록 같은 면적에 더 많은 소자를 배치하면서 화질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나노 기술은 같은 공간에 더 많은 소자를 넣어 기기 성능과 효율을 높이는 쪽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백신 만들고 지구도 지킨다

나노 기술은 단순히 크기만 줄이는 걸 넘어 물질 성질을 원하는대로 바꾸기 위해서도 쓰입니다. 일례로 이산화티타늄이라는 물질이 있습니다. 이 물질을 수십㎚ 크기로 작게 만들면 그보다 입자가 컸을 때는 없던 ‘광촉매’ 성질이 생겨납니다. 광촉매란 빛을 받으면 촉매반응을 일으켜 세균과 오염물질을 분해하는 물질입니다.

이산화티타늄을 나노 단위로 쪼개 광촉매로 이용하는 연구는 1980년대부터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이산화티타늄이 병원균은 물론 공기질을 떨어트리는 오염물질도 제거할 수 있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나노 기술은 백신 같은 제약바이오 분야에도 적용된다./그래픽=이은현

제약·바이오 분야에서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 메신저 리보핵산(mRNA) 백신 제조에 나노 기술이 쓰였습니다. mRNA 백신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됩니다.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유전물질인 mRNA와 이를 감싸고 몸 속까지 안전하게 전달하는 나노 전달체입니다. 나노 전달체를 만드는 과정에 나노 기술이 빛을 발했습니다.

mRNA 백신 개발사인 화이자와 모더나는 인지질과 콜레스테롤을 합쳐 ‘이온화 가능한 지질’을 만들고 그 안에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전정보가 담긴 mRNA를 넣었습니다. 이후 전달체 표면을 폴리에틸렌글리콜로 포장했는데 이는 혈관에서 바이러스가 아닌 다른 물질에 백신이 달라붙지 않고 몸속에 오래 머무를 수 있게 해줍니다.

나노 기술은 지구를 위협하는 온난화를 막는데도 쓰입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청정에너지연구센터 오형석 박사 연구팀은 나노미터 수준의 가지형 텅스텐-은 촉매 전극을 개발해 인공광합성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광합성은 식물이 햇빛을 받고 물과 이산화탄소(CO₂)로 유기물을 합성하는 것입니다. 인공광합성은 마찬가지로 태양광을 이용해 이산화탄소를 일산화탄소(CO)나 메탄올, 에탄올, 에틸렌 등 화학산업에 필요한 원료로 전환하는 기술입니다.

불소 도핑 산화주석 촉매가 적용된 이산화탄소 전환 개미산 생산 및 활용을 설명한 모식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이산화탄소는 지구 온난화를 유발하는 온실가스입니다. 이렇게 이산화탄소 배출을 막는 탄소중립 기술을 실현하는 데 꼭 필요한 게 바로 나노 기술입니다.

기체 상태의 이산화탄소를 일산화탄소로 바꾸기 위해서는 고효율의 텅스텐-은 촉매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텅스텐 위에 나노미터 수준의 은 입자를 입혀야 합니다. 이렇게 나노미터 수준으로 줄인 촉매는 기존의 은 촉매보다 일산화탄소 생산 효율이 60% 이상 향상됐죠.

이외에도 구리 나노촉매 전극을 이용하면 이산화탄소 전환시스템에서 에틸렌과 에탄올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서 이산화탄소를 일산화탄소로 바꾸는 것과 같은 원리죠. 이산화탄소로부터 수소저장물질인 ‘개미산(formic acid)’을 생산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나노 기술이 지구를 지키는 데도 쓰이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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