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곰표 밀가루’가 美 대자연에 세운 기념비 ‘라 비블리오테카’

유진우 기자 2023. 1. 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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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바로 위에 붙어있는 오리건 주(州) 별명은 ‘비버 스테이트(The Beaver State)’다. 직접 나뭇가지를 엮어서 댐을 만들기로 유명한 야생동물 비버가 많이 살아서 붙은 이름이다. 이 지역은 드넓은 미국에서도 산, 폭포, 강, 숲이 유난히 많아 비버가 살기에 딱 좋다.

비버에는 천혜의 환경이지만, 이 지역을 처음 일궜던 개척자들에게 오리건은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19세기 척박한 미국 중서부 사막지대를 피해 오리건으로 이주해 온 초기 서부 개척자들은 이 지역을 ‘에덴동산 문 앞의 땅(the land at Eden’s gate)’라 불렀다. 천국처럼 아름답지만, 그만큼 도달하기 어렵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았다.

우리나라에 오리건은 캘리포니아만큼 잘 알려진 지역은 아니다. 일부 스포츠 매니아들이 ‘나이키의 고향’으로 알고 있는 정도다. 와인 산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캘리포니아 일대에는 우리나라 기업 자본이 대거 들어가거나 한국 국적 인력이 빼어난 와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활약상이 점차 늘고 있다.

전 세계에서 네번째로 큰 와인 생산국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는 가장 많은 양의 와인을 만드는 주다. 미국산 와인 가운데 85%가 이 지역에서 나온다. 반면 오리건에서 나는 와인은 전체 미국 와인 생산량의 1.5%에 그친다. 그만큼 국내에 들어오는 오리건산(産) 와인도 적다.

국내에서 곰표 밀가루로 잘 알려진 대한제분은 지난 2008년 오랫동안 불모지에 가까울 정도로 인지도가 낮았던 이 지역에 ‘라 비블리오테카’라는 와이너리를 세웠다. 라 비블리오테카는 스페인어로 도서관을 뜻한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가 쓴 대표작 ‘바벨의 도서관(La biblioteca de Babel)’에서 영감을 받은 명칭이다.

이 소설 속 도서관은 마치 세포처럼 촘촘히 연결된 여러 서재들이 무한에 가까운 구조로 쌓여 있다. 여러 요소를 세밀하게 조절해 조화로운 와인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래픽=손민균

국내 기업 가운데 오리건에 직접 와이너리를 세워 와인을 만든 사례는 대한제분이 처음이다. 천혜의 자연 환경일지라도, 좋은 포도를 키워 상품성 있는 와인을 만들어 내려면 그에 수반하는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가 발생해야 한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키우는 포도는 키우기도 어려울 뿐 더러, 인력이 부족해 생산량도 전 세계에 내놓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라 비블리오테카 와이너리가 자리잡은 윌라멧 밸리 지역에서 키우는 피노누아(pinot noir)라는 포도 품종은 여러 포도 가운데서도 재배하기 까다로운 품종으로 유명하다. 피노누아는 껍질이 얇고 포도알이 빽빽해 병충해에 취약한데다, 기후에 민감해 조금만 더워지면 포도가 일찍 여물어버린다.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유명 와인 대부분은 카베르네 쇼비뇽을 중심으로 여러 포도 품종을 섞어 만들지만, 오리건 윌라멧 밸리는 오로지 피노누아 하나만 사용하기 때문에 매년 균일한 품질로 와인을 생산하기가 더 힘들다.

미국 나파밸리 와인을 고급 와인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평을 듣는 전설적인 와인 양조가 안드레 첼리체프(Andre Tchelistcheff)조차 “카베르네 소비뇽은 신이 만들었지만, 피노 누아는 악마가 만들었다”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제대로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빚으면, 오리건 자연 환경을 그대로 투영해 미묘한 개성과 특징을 보여준다. 와인의 떫은 맛을 내는 타닌이 적어 우아하고, 신선하며 섬세한 향기를 뿜어낸다.

라 비블리오테카 와이너리는 이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량을 극소량으로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라 비블리오테카 피노누아는 연간 생산량이 5000병 정도에 불과하다. 프랑스 보르도 지역 유명 와이너리들이 연간 20만~30만병에 가까운 와인을 만드는 데 비하면 채 5%에도 못 미친다.

대신 지리학적 요소와 실력있는 와인 양조가를 섭외해 품질 높은 와인을 뽑아낸다.

라 비블리오테카가 포도를 키우는 얌힐 칼튼(Yamhill-Carton) 지역 와파토 릿지 빈야드(Wapato Ridge Vineyeard)는 페너 애쉬(Penner Ash)와 보 페레(Beaux Freres) 같은 미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와이너리와 인접해 있다. 이 지역 흙은 물기를 많이 머금은 점토질이라 피노 누아의 깊은 풍미를 한층 살려준다. 맥민빌(McMinnville) 지역 예그리나 빈야드(Aegrina Vineyard)는 화산 분출물이 섞인 흙이 현무암 토양에 섞여 있어 포도가 천천히 내실을 키우며 자라기 좋다.

이 와인은 2022 대한민국 주류대상 레드 와인 신대륙 6만~10만원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우리나라에는 대한제분 자회사 비티스가 수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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