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에게나’ 친절합니다

봉달호 '힘들 땐 참치 마요' 저자 입력 2023. 1. 28. 03:01 수정 2023. 1. 29. 05:3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봉달호의 오늘도, 편의점]
일러스트=김영석

“혹시 사귀는 사람 있으세요?” “없는데, 왜요?” 언제나 명랑하던 목소리의 끝자락이 살짝 희미해졌다. 남자의 눈이 환희로 글썽이며 반짝인다. “그럼 저랑 사귀실래요?”

연정씨가 고백을 받았다. 만 3년 일하는 동안 벌써 네 번째 남자다. 뭔가 말할 듯 망설이다 그냥 돌아선 ‘의심 사례’까지 포함하면 예닐곱명쯤 될 것이다. “축하해. 이러다 우리 편의점이 고백 맛집 되겠어.” 농담 섞인 격려에도 고백의 수혜자는 마냥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 표정이다. “앞으로 계산대 위에 안내문 하나 붙여 놓아야겠어요.” “무슨 안내문?” “제가 당신에게 친절한 이유는 ‘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요.”

우리 동네 담배 가게에는 아가씨가 예쁘다면서 온 동네 청년들이 너도나도 기웃거렸다는데(송창식의 ‘담배 가게 아가씨’ 가사) 이제는 새 시대의 담배 가게 편의점으로 무대가 바뀌었나 보다. 편의점에서 일하다가 고백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저는 그냥 결혼했다고 말해요. 애가 벌써 셋이라고 덧붙이기도 하고요.” 손님에게 고백받으면 어떻게 응대하느냐는 질문에 어느 알바생이 했던 말이다. “그걸 그 사람이 믿어?” “믿거나 말거나 일단 세게 나가야죠.” 편의점, 카페, 식당, PC방, 다양한 세상 경험에 빛나는 스물셋 그녀의 대답이다. 스물셋이 애가 셋이라….

다른 거절법도 있다. “고맙습니다만, 여기 편의점 점주가 제 남편이에요”라고 엉뚱한 사람을 배우자로 만드는 방법이 있고, 조카 사진을 보여주며 “제 아들이에요” 한다는 철저한 증거 제시형도 있다.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는 비교적 온건한 처신법이 있고, “곧 청첩장 나오는데 보내드릴까요?”라는 위트형도 기발하다. 어쨌든 공통점은 상대방이 일말의 미련을 가질 여지를 냉정히 차단한다는 점. “좋은 손님 한 분 놓칠 수도 있지만, 제 경험으로는 단호해야 해요. 틈새를 남겨두면 그걸 도전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간혹 있거든요.” 서너달에 한 번꼴로 고백을 받는다는 경기도 용인 어느 편의점 점주의 말이다.

“그냥 고백만 하면 다행이죠. 근무시간 언제 끝나느냐고 계속 묻고, 대답 안 해주니까 편의점 앞에 보란 듯 기다리고 서 있으면 여자로서 심정이 어떻겠어요?” 결국 경찰에 신고해 ‘안심 귀가’ 에스코트를 받았다는 알바가 있고, 그러다 검찰청과 법정까지 드나들었다는 점주 또한 있었다. 따뜻한 이야기가 쏟아져나올 줄 알았던 편의점에서의 고백 경험에 대한 내 소박한 취재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고 보면 퇴근 시간 기다렸다가 “그 아가씨 발걸음 소리 맞춰 뒤따라 걸어간다”는 노래 가사는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낭만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어쩌면 스토킹 행위에 가깝지 않은가. 얼마나 매너 있게 행동하느냐,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겠지만.

돌아보니 나도 남몰래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많았다. 중학교 때 같은 교회 여자애를 줄곧 짝사랑했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 근처 서점에서 일하는 누나를 좋아했다. 멋있어 보이려고 수준에 맞지도 않는 책을 여러권 샀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샀으면서도 내 마음에 있는 것들은 끝내 말하지 못했다. 대학 때는 다른 과 여학생 때문에 한동안 몸살을 앓았다. 우연히 마주친 척하기 위해 그녀가 지나는 길목을 수시로 오가고, 강의실 앞을 온종일 서성이거나, 심지어 그녀가 듣는 수업으로 수강 신청 과목을 바꾸기도 했는데 정치외교학과 학생이 통계학과 수업을 듣는 것은 과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역시 그러고 보면 자주 들르는 편의점 계산대 직원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남자는 대단하지 않은가. 조심스러운 용기에는 일단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에도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기호 작가의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라는 소설집이 있다. 그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 편의점 직원 연정씨는 누구에게나 친절하다. 편의점뿐 아니라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누구에게나 친절히 대하려고 노력한다. 나의 친절이 특정인만을 위한 친절로 오해받을 수 있으리란 생각까지는 하지 않고 친절하다. 그러니 오해마시길. 그렇다고 적당히 친절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이것 참 은근히 난해한 일이기도 하다.

새해 소원이 뭐냐는 질문에 연정씨는 이렇게 말했다. “별것 있나요. 가족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고, 하는 일 잘됐으면 좋겠고, 그리고….” “그리고 또 뭐?” “올해도 두 번 정도는 고백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친절해 보겠습니다.” 역시 우리 편의점 에이스답다. 이런 연정씨와 사귀는 사람은 그야말로 복권에 당첨된 것이다. 바라건대 고백에 차인(?) 남자 손님도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계속 찾아왔으면 좋겠다. 올해는 누군가와 커플 반지를 낄 수 있게 되길 마음으로 빌어드리리다. 그리고 또 하나. 송창식씨의 ‘담배 가게 아가씨’는 여전히 나의 노래방 애창곡이다. “아자자자자자자 나는 지금 편의점에 삼각김밥 사러 간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