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원하는 악당? 독재자 스탈린을 파헤치다

김용출 2023. 1. 28.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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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전쟁 리더십’ 새롭게 들춰내
희대의 악인 인정하며 다른 모습 조명
2차대전 당시 英·美 동맹국 지원 요청
얄타회담 등 외교적 대화로 실익 챙겨
美 불참 예견한 한국전은 뼈아픈 오판
고위급 숙청 등 폭력적 시스템 지적 속
히틀러에 맞서 승리 이끈 공로 인정도

스탈린의 전쟁/제프리 로버츠/김남섭 옮김/열린책들/4만5000원

“이오시프 스탈린이 대량으로 사람들을 살육하고, 고문하고, 감옥에 가두고 억압했다는 기존의 인상은 틀린 게 아니다. 하지만 그 시대의 모든 범죄와 고통을 스탈린의 탓으로만 돌리면, 이 엄청난 재능을 가진 정치인을 이해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를 단순히 괴물이나 정신병 환자로 치부할 수도 없다.”

스탈린의 유명한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인 로버트 맥닐은 아돌프 히틀러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악당으로 평가되는 스탈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스탈린이 잔혹한 독재자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모든 부조리와 모순을 깡그리 그의 탓으로 돌려버리면 스탈린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취지다.
소련 문서고에서 새로 공개된 자료와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스탈린의 전쟁 리더십을 새롭게 조명한 책이 나왔다. 책은 스탈린이 잔혹한 독재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독일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사 지도자였고, 전후엔 냉전보다는 평화를 선택했다고 분석한다. 사진은 1945년 2월 얄타 회담 모습. 출판사 제공
영국의 대표적인 소련 전문가인 제프리 로버츠가 쓴 신간 ‘스탈린의 전쟁’(원제: Stalin’s Wars)은 바로 이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스탈린의 전쟁 리더십을 새롭게 조명한 책이다. 즉, 스탈린을 악당에서 선인으로 복권하자는 게 아니라, 악당으로서 스탈린을 인정하면서도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자는 얘기다. 특히 지난 15년 동안 소련 문서고가 개방돼 수많은 새 문서가 공개되고 있는 것 역시 이 같은 접근에 힘을 싣는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부터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까지를 다룬다. 이를 통해 스탈린의 잔혹성을 확인하는 한편, 그가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사 지도자였고, 전후에도 냉전보다는 미국 및 영국과의 대연합이 지속되길 원하며 평화를 선택했다고 분석한다. 우리가 스탈린에 갖고 있는 잔혹한 독재자나 악당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책에 따르면, 스탈린은 제2차 대전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엄격한 규율과 가혹한 처벌로 장교들의 후퇴를 단속하는 한편,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웠기에 가능했던 승리였다.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필요한 지원을 구체적으로 요구했으며, 상대방을 설득해 작전 수행에 동의를 얻었다.

외교적으론 소련·서방 연합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등 전후 처리를 위한 논의 자리에서도 스탈린은 소련의 안보와 인민민주주의 체제 수립을 위해 외교적 대화에 적극 나서 실익을 챙겼다.
제프리 로버츠/김남섭 옮김/열린책들/4만5000원
하지만 여러 차례 오판과 실패를 저지르기도 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먼저 1939년 8월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 협정을 맺어 전쟁 초반 선제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무엇보다 비판받는 건 전쟁 중 진행한 잔혹한 숙청작업이었다. 그는 전시 동안 대숙청으로 정치지도위원 수천 명을 죽였다. 원수 3명, 장군 16명, 제독 15명, 대·중령 264명, 소령 107명 등이 사망했다.

스탈린의 전쟁 리더십에 대한 평가도 확 갈린다. 대표적 비판론자인 전기 작가 드미트리 볼코고노프는 스탈린에 대해 “천재적인 군사 지도자가 아니고, 전문적인 군사적 수완이 없으며, 오직 피에 젖은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전략적 지혜를 갖게 됐다”고 혹평했다. 반면,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모스크바에서 미국 대사를 역임한 애버럴 해리먼은 1981년 인터뷰에서 예상외로 호평했다. “전쟁 지도자 스탈린은 인기가 좋았고 소련을 단결시킨 사람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비상 상황에서 국가 지도자의 소임을 다했던 스탈린을 특히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런다고 스탈린의 잔학무도함에 대한 혐오가 최소한으로 줄어들지는 않겠지만, 다른 측면뿐 아니라 건설적인 측면도 보여줘야 한다.”

냉전체제의 기원과 경위를 놓고서도 기존 시각과 다른 사실이 제시된다. 소련이 냉전과 갈등을 주도하면서 서방이 불가피하게 냉전체제 구축에 나섰다는 서방의 기존 시각과 달리, 저자는 스탈린이 냉전보다는 평화노선을 선택했다고 평가했다. 즉, 냉전은 1947년 3월 공산주의 침략과 팽창주의에 맞선 세계적 규모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트루먼 선언이 있고, 6개월 뒤 유럽 경제적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이 발표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스탈린은 이에 그해 9월 코민포름을 창립하고 즈다노프의 연설을 통해 국제 정치가 두 진영으로 분열해 굳어졌다고 선언하면서 대연합이 최종적으로 파탄하고 냉전이 개시됐다고 분석했다.
스탈린의 잘못은 냉전 시기에도 이어졌다. 그는 냉전 결과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1948년 유고슬라비아 티토와 분열했고, 그해 베를린을 봉쇄했다가 서방의 반격으로 철회하는 등 실패가 이어졌다. 가장 값비싼 오판은 한국전쟁이었다. 처음에는 미국과의 충돌을 우려해 전쟁을 강하게 반대했던 그는 1950년 김일성의 요청을 받은 뒤 미군이 참전하지 않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남한 침공을 승인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예상과 달리 미국이 참전하면서 길어졌고, 전쟁 결과 한반도에 미군이 장기 주둔하게 됐으며, 일본 역시 강대국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침공을 개시했을 때 그들이 출발했던 지점으로 돌아갔고, 남한의 독립은 대규모 미군의 주둔으로 보장됐으며,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위상을 떠받치는 기둥이 됐다. 전쟁 수행에 대한 중국과 스탈린의 견해차로 적의가 깊어지면서 1950년대 말에 중·소 분열이 촉발되었다. 스탈린의 마지막 전쟁은 그가 겪은 가장 비참한 실패 중 하나였다.”

저자는 오판을 저지르고 잔혹했지만 그럼에도 스탈린은 성공적인 지도자였다고 평가한다. 즉, 스탈린은 “현실주의자이고 실용주의자였으며, 소비에트 시스템이나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지 않는 한 타협하고 변할 각오가 되어 있는 지도자였다”며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시스템을 창출했지만, 그것은 히틀러에 맞선 매우 힘든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유일한 시스템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사후 3년이 된 1956년 2월, 스탈린은 새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비판받기 시작했다. 흐루쇼프는 대조국 전쟁 승리는 공산당과 그 지도부의 집단적 노력 덕분이지 스탈린의 덕분이 아니며, 스탈린은 오히려 해로운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비판은 1980년대와 1990년대로 이어지면서 봇물을 이뤘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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