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징궈, 소련군에 “몰수 기관차·화폐 등 반환을” 당찬 요구

2023. 1. 28.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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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1〉
루스벨트 사망 1주일 후 신임 대통령 트루먼(오른쪽 셋째)과 회담을 마친 중국 외교부장 쑹즈원(오른쪽 둘째). 1945년 4월 18일, 백악관. [사진 김명호]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은 당황했다. 6개월 전 얄타에서 맺은 밀약 이행을 서둘렀다. 8월 9일, 탱크와 대포 5300대를 앞세운 150만 대군이 전투기 5200대의 엄호를 받으며 소·만 국경을 무너뜨렸다.

10일 새벽 3시, 도쿄의 황궁 방공호에서 최고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1개월 전 포츠담회담 기간 중 트루먼, 처칠, 스탈린, 장제스 명의로 발표한 선언, 일본의 무조건 항복 촉구를 수락하기로 합의했다. 소식을 접한 스탈린은 찔끔했다. 대일선전이 하루만 늦었어도 일본 식민지 동북(만주)에 진군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주력을 중국 내지와 동남아로 투입한 일본 관동군은 소련의 화력에 무릎을 꿇었다.

다롄서 만든 호화열차, 시속 130㎞ 질주

창춘에 도착한 쑹메이링을 영접 나온 장징궈와 소련군 참모장. [사진 김명호]
일본 투항 전 중국 동북지역(만주국)의 경제 규모는 일본 본토를 제친 지 오래였다. 미국, 소련, 영국, 다음 가는 세계 4위를 자랑하고도 남았다. 1만5479km에 달하는 철로와 1940년 ‘다롄(大連) 기계창’에서 제작한 아세아호는 발군이었다. 냉난방 시설을 완비하고 시속 130km로 만주벌판을 질주한 세계 최고의 호화열차였다. 철도는 동북의 얼굴이나 다름없었다. 다롄에서 선양(瀋陽)까지 철로 양편은 공장지대였다. 빽빽한 연통에서 뿜어내는 시꺼먼 연기가 그칠 날이 없었다. 당시 동북의 공업 총 생산량이 중국의 85%였다. 통신시설도 완벽했다. 1927년 장쭤린(張作霖·장작림) 통치 시절 베이징이나 상하이는 유럽과 미국에 직접 전문을 보낼 수 없었다. 선양전신국을 경유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하얼빈(哈爾賓)은 국제도시로 손색이 없었다. 1928년, 유럽 각국으로 향하는 열차표와 항공권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외국인이 개설한 1809개 상업기관이 뉴욕과 파리에 지사를 설립하고 상거래를 텄다. 외국은행 지점도 부지기수였다.

만주국 정부와 중화민국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43년 동북은 중국 총면적의 12%, 인구는 10%에 불과했다. 철 생산량은 전 중국의 93%, 시멘트 64%, 화공품 69%, 기계생산 95%, 전력은 78%였다. 소련의 잔치판이 벌어졌다. 3주간 주둔하고 3개월 후 완전철수를 장담했던 탓에 시간이 촉박했다. 동북의 공장과 통신시설, 광산의 중요설비를 깡그리 소련으로 실어 날랐다. 만주국 수도였던 창춘(長春)의 관공서에 있던 가구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중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안깡(鞍鋼·안산철강) 약탈은 가관이었다. 40일간 수송 열차 60대를 동원해도 부족했다. 공업 도시 선양은 참담했다. 8월 18일부터 11월 중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소련으로 향하는 화물열차 200량이 기적을 울렸다. 공장의 90% 이상이 폐허로 변했다. 창문과 수도꼭지도 온전치 못했다. 도자기 공장과 소형 백주(백알) 양조장도 털리지 않은 곳이 단 한 곳도 없었다. 방직공장 직조기와 창고는 뭐하던 곳인지 짐작이 안 갈 정도였다. 1946년 동북공업회 조사대로라면 소련에게 털린 손실이 당시 돈 20억 달러에 해당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미국 항공기 조종사의 회고를 소개한다. “창공에서 선양을 지나친 적이 있다. 만신창이가 된 도시에 멀쩡한 것이 한 개 있었다. 시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소련군이 중국인들에게 선물한 ‘소련군열사기념비’였다.”

1945년 늦가을, 거리의 담배팔이로 나선 일본교민. [사진 김명호]
이쯤 되면 장제스나 마오쩌둥이 얄타밀약에 분개한 것이 당연했다. 양측 모두 소련군으로부터 동북을 접수한 후 내전을 치를 준비에 골몰했다. 8월 29일부터 10월 10일까지 충칭에서 열린 장제스와 마오의 평화담판은 시간 끌기였다. 회의 말석에 앉아있던 장징궈(蔣經國·장경국)도 마오와 처음이자 마지막 악수를 하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동작은 마오가 장제스보다 한발 앞섰다. 산둥(山東)에 있던 신사군(新四軍)과 팔로군(八路軍) 8만 명 외에 간부 2만 명을 동북으로 이동시킨 후 분산시켰다. 10일 1일 담판 중인 장제스와 마오에게 소련이 선물을 보냈다. “동북에 주둔 중인 소련군은 10월 말부터 철수를 시작한다.” 장제스는 마오와 평화협정 체결 당일 충칭에 와있던 동북행영(行營) 주임 슝스후이(熊式輝·웅식휘)를 동북으로 돌려보내며 장남 장징궈를 외교특파원 자격으로 딸려 보냈다.

장제스·마오에게 “동북 주둔 소련군 철수”

1945년 8월, 다롄에 입성한 소련군에게 환호하는 중국인들. [사진 김명호]
장징궈는 창춘 도착 이튿날 전 관동군사령부 회의실에서 소련군 사령관 마리노프스키 원수와 회담했다. 당찬 요구를 했다. “철병 계획 요지를 알려주기 바란다. 우리 군이 4개 항구에 상륙할 예정이다. 상륙 후 이동에 필요한 열차와 안전을 보장해주기 바란다. 베이핑(베이징)에서 선양까지 파괴된 철로를 원상대로 복구해라. 소련군이 몰수한 기관차와 통신장비, 경찰 총기류, 만주국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와 일반은행이 발행한 어음을 우리 측에 반환해라. 소련군이 이용하는 선박과 항공기를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협조를 청한다.” 역전의 소련군 원수는 얼굴 붉히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날 밤 장징궈는 충칭에 있는 부친에게 급전을 보냈다. “소련군은 ‘공당(共黨)’을 지지하는 눈치다. 창춘 부근에 중공군 2000여 명이 집결해있다. 소련군 사병들의 기율이 엉망이다. 창춘에서 총살에 처한 사병이 100여 명에 달한다. 소련군이 전리품으로 본국에 보낸 중장비와 문화재는 정식으로 교섭을 통해 돌려받을 생각이다. 올해 동북은 대풍년이다. 애국에 대한 열정이 관내(關內)보다 높다. 미국에 있는 쑹즈원(宋子文·송자문)이 트루먼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다.” 장제스는 흐뭇했다. 장징궈를 지원하기 위해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에게 창춘 방문을 권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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