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오디오서 얻은 심미안, 애플 디자인에 녹이다

2023. 1. 2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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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들이 사랑한 오디오
애플 창업자 스티브잡스가 아이팟을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은 반도체 산업이 태동한 실리콘 밸리 동네 친구였다. 그들은 막 부상하기 시작한 컴퓨터에 대한 호기심,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금세 가까워졌다. 잡스에게 뮤지션 밥 딜런의 위대함을 알려준 사람은 워즈니악이었다. 밥 딜런에 흠뻑 빠진 두 사람은 밥 딜런 콘서트가 담긴 부틀렉(해적판 음반)을 구해 함께 즐겼다. 잡스는 더 나아가 고급 티악 오픈릴 데크를 구매해서 부틀렉을 편집, 자신만의 앨범을 제작해 잠들기 전까지 몇 시간이고 반복해 들었다. 이것이 스티브 잡스 오디오 라이프의 시작이었다.

1975년 6월 29일 워즈니악이 개인용 컴퓨터를 발명한다. 애플 최초의 PC, 애플 I이다. 잡스는 성공을 예감하고 창업을 추진한다. 자신의 직장 선배 론 뤠인을 끌어들여 1977년 1월 애플 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이로부터 3년 11개월 후 애플은 나스닥 상장에 성공한다. 1956년 포드 상장 이래 가장 많은 투자자가 몰렸으며 애플의 기업 가치는 17억 9000만 달러로 치솟았다. 25살의 스티브 잡스는 2억 5600만 달러의 자산가가 되었다.

항상 최신 하이엔드 오디오 고집

미셸 자이로 덱 턴테이블. 잡스가 숙고 끝에 고른 턴테이블. 아이코닉한 디자인을 자랑한다. [사진 Michellaudio]
잡스는 부를 과시하는 일에 관심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장인이 만든 세련된 제품을 경험해 아름답고 유용한 제품을 세상에 내놓는 데 있었다. 포르쉐, 벤츠 자동차를 고집했고 BMW 빈티지 바이크도 사랑했다. 올리베티, 키친 에이드, 티지오 램프를 즐겨 사용했고, 그런 최고의 제품을 경험하며 쌓은 심미안을 오롯이 애플 제품의 디자인에 쏟았다. 디자이너에게 자신의 포르쉐 928을 보여주며 “앞으로 애플의 디자인은 포르쉐처럼 유행을 타지 않는 마스터피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캘리포니아 우드사이드에 근사한 주택도 마련했다. 가구에 무척 까다로웠던 그는 마음에 드는 가구를 발견할 때까지 어떤 가구도 사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소파가 없어 스티로폼에 앉아야 했다. (10여년 후에야 임스 라운지 체어를 마련했다.) 하지만 오디오는 서둘러 구매했다. 디터 람스의 브라운, 데이비드 루이스의 뱅앤올룹슨에 잠시 관심을 가졌지만 음이 성에 차지 않았다. 다른 제품은 클래시컬한 제품을 사랑했지만 오디오는 항상 최신 하이엔드 오디오를 고집했다. 릴테잎으로 시작해 LP, CD, LD, DVD, 블루레이 등 신기술이 소개될 때마다 시스템을 거침없이 업그레이드했다.

하지만 잡스는 자신의 오디오 시스템을 좀처럼 공개하지 않는다. 자신이 사용하는 브랜드가 알려져 애플의 브랜드가 희석되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1982년 그의 오디오가 우연히 알려졌다. 한 인터뷰에서 자택 바닥에 앉아 LP를 감상하는 모습을 촬영했는데 그의 뒷편으로 오디오 시스템이 슬쩍 공개된 것이다. 당시 그의 오디오 시스템은 어쿠스탯(Acoustat) 스피커, 쓰레숄드(Threshold) 앰프, 미셸 엔지니어링(Michell Engineering) 턴테이블, 데논(Denon) 튜너다. 이는 1982년 당시 최고의 제품을 모은 조합으로, 오디오 전문가의 세심한 컨설팅을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어쿠스탯은 머리카락처럼 얇은 금속 진동판에 강력한 전압을 걸어 맑고 투명한 음을 만들어 내는 정전형 스피커(정전기를 이용하여 음을 재생하는 스피커)다. 1980년대 미국 오디오 산업은 어쿠스탯, 마틴로건, 아포지 어쿠스틱스 등 정전형 스피커 기업의 전성시대였다. 잡스는 이 트렌드를 읽어 JBL, 탄노이와 같은 전통적 오디오 기업이 아닌 자신과 같은 벤처 기업 제품을 과감히 선택했다. 그는 구매한 오디오의 음에 감동했다. 자신의 애플 직원도 이 음을 경험하기를 원했다. 또 다른 정전형 스피커인 마틴로건 스피커를 구매해 애플 본사 로비에 설치했다. 그는 좋은 제품을 디자인하기 위해 반드시 궁극의 경험이 필요하다 보았다.

잡스는 오디오의 음에 집중했지만 그렇다고 디자인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어쿠스탯 스피커는 앞뒤 폭을 얇게 만들 수 있는 정전형 스피커의 특성을 이용해 마치 일본식 병풍같은 디자인이었다. 당시 그는 일본을 방문하며 선불교, 교토 정원과 같은 일본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때라 이 디자인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미셸 엔지니어링의 자이로덱(Gyrodec)은 그의 까다로운 심미안을 당당히 통과한 턴테이블로, 30년이 지난 지금도 촌스럽지 않은 세련된 디자인을 보여준다. 그 뿐인가. 쓰레숄드 앰프는 천재 설계자 넬슨 패스와 산업 디자이너 르네 베스네가 공동 작업해 성능과 디자인 모두를 갖춘 제품이었다.

제네렉 1029A. 잡스가 집무실에서 아이튠스의 음을 체크한 스피커다. [사진 Genelec]
그의 오디오 사랑은 결혼 후에도 이어진다. 1991년 로렌 파월과 결혼 후 팔로알토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여전히 가구는 한 점도 들이지 않았지만 오디오는 최신 제품으로 마련했다. 이후 그의 오디오는 알려지지 않다가 2004년 자택 내 집무실 공개에서 노출됐다. 조지 나카시마 코노이드 체어에 앉아 있는 그의 앞에 놓인 작은 스피커는 제네렉(Genelec) 1029A다. 제네렉은 전세계 음악 스튜디오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스피커로, 잘 드는 칼날처럼 예리하고 적확한 음을 들려준다. 그는 제네렉 스피커로 자신의 음악 서비스 아이튠스의 음을 체크했다.

오디오 업계에는 유독 ‘스티브 잡스가 애용한 오디오’라 광고하는 메이커가 많다. 이는 그가 수십년간 수많은 오디오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디터 람스의 브라운(Braun)의 오랜 사용자라는 속설은 틀렸다. 이는 아이팟이 브라운 T3, 아이맥이 LE1 디자인을 오마쥬한 데서 발생한 오해다. 실제 디터 람스를 존경한 인물은 잡스가 아닌 애플의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다. 조너선 아이브가 오랜 존경을 담아 아이팟, 아이맥을 디자인했다. 잡스도 디터 람스에 잠시 관심을 가졌지만 20대에 자신의 천재성을 모두 써버리고 80년대에 범작을 내놓는 그에게 이내 관심이 식었다. 애플의 디자이너로 리차드 샤퍼, 조르제토 주지아로, 에토레 소트사스가 물망에 오른 가운데 그가 최종 낙점한 이는 소니 트리니트론 TV의 신화를 만들어낸 하르트무트 애슬링거다. 이후 잡스는 애슬링거와 십여년을 함께 일했다.

오디오 명기 섭렵해 ‘다른 생각’ 도출

어쿠스탯 스피커. 일본식 병풍과 같은 디자인을 잡스는 사랑했다. [사진 Acoustat]
잡스는 음악도 열렬히 사랑했다. 10대 시절 밥 딜런에 대한 동경은 평생 이어져, 밥 딜런의 2006년 앨범 ‘모던 타임스’는 애플이 마케팅한 덕분에 30년만에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첼리스트 요요마도 사랑해 자신의 결혼식에 초대했지만 공연 스케줄 탓에 불발됐다. 이후 요요마는 그의 집을 찾아 1733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잡스가 좋아한 바흐를 연주했다. 연주를 듣고 잡스는 “당신의 연주는 신이 존재하는 증거군요”라며 눈물을 흘렸다. 투병 중 잡스는 자신의 장례식에 요요마가 연주해줄 것을 부탁했고 요요마는 그 약속을 지켰다.

오디오, 음악에 대한 사랑은 결국 그를 음악, 오디오 사업으로 이끌었다. 90년대 말 냅스터 등으로 디지털 음원 불법 유통이 기승을 부리자 “지적재산권은 보호 받아야 합니다. 예술가는 자신의 창작물로 돈을 벌 수 있어야 해요”라고 강조하며 아이튠스와 아이팟을 출시했다. 아이튠스는 출시 6일만에 100만곡 판매를 기록하며 단번에 디지털 음악 시장을 독점했다. 아이팟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오디오가 되었으며, 이후 아이폰 등장의 초석이 된다. 스티브 잡스의 혁신에는 오랜 시간 음악과 오디오를 열정적으로 즐겨온 경험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2011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철학적 토대 아래 애플은 순항 중이다. 여전히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은 애플이다. 하지만 그가 떠난 이후 애플에 미묘한 변화들이 감지된다. 애플이 지배하던 음악 시장에서 애플 뮤직은 스포티파이에 밀려 만년 2위다. OTT 시대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애플TV+는 존재감조차 없다. 잡스와 함께 압도적인 디자인 피스를 쏟아낸 조너선 아이브도 그가 떠난 이후 인상적인 제품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의 부재가 아쉽게 느껴진다.

스티브 잡스의 정신을 좇는 이들이 그와 관련된 빈티지를 수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잡스는 ‘콜렉터’가 아니라 철저한 ‘사용자’였다. 당대 최고의 제품을 치밀하게 사용하며 그 경험을 애플 제품에 녹여냈다. 버튼을 디자인할 때에는 시중에 판매되는 버튼 50개를 한데 모아 직접 사용해 보고 만족할 때까지 수정을 반복했다. 그의 팬들이 빈티지 오디오를 사용하는 것도 넌센스다. 잡스는 궁극의 음을 경험하기 위해 전문가의 조언을 경청하며 최고의 하이엔드 오디오를 섭렵했다. 잡스는 장인의 고도한 정수가 스며 있는 명기(名機)를 사용해 궁극을 경험할 때 비로소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믿었다. Think different, 스티브 잡스가 우리에게 남긴 화두다.

이현준 오디오 평론가. 유튜브 채널 ‘하피TV’와 오디오 컨설팅 기업 하이엔드오디오를 운영한다. 145년 오디오 역사서 『오디오·라이프·디자인』을 번역했다. 한국 오디오 문화를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일에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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