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따신 새 이불, 받아본 사람 있으면 나와보시라!

2023. 1. 27.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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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요한게 사라진 현대사회
나물 선물에 후배가 보낸 이불
시골 노모 배려한 따뜻한 마음
돈으로 값어치 가늠할 수 없어

어린 시절, 명절이면 으레 친척이나 이웃들과 선물을 주고받았다. 선물 기준은 매우 간단하고 명료했다. 나에게는 남고 남에게는 모자라거나 없는 것. 콩 농사를 짓지 않은 친지에게는 콩 한두 되, 간장이 떨어진 누군가에게는 간장 한 병, 이런 식이었다. 솜씨 좋은 동네 사람은 직접 만든 유과나 조청, 두부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때의 선물은 과하지 않았고, 받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긴요하게 생계에 도움이 되었다. 물론 돈이 들어가는 선물도 있었다. 엄마는 명절 직전이면 꼭 대목장을 봤다. 제사 지내는 큰집에는 동태나 조기 한 궤짝을 사서 선물했고, 몇몇 신세를 갚아야 하는 지인들에게는 3㎏짜리 설탕을 선물했다(그때는 설탕이 그리도 귀했다). 명절 앞두고 이웃이나 친지의 상황을 촘촘히 살펴 챙기는 그 마음을 서울 간 뒤 까맣게 잊었다.

서울 살 때는 선물할 일이 별로 없었다. 생일이고 뭐고 친한 친구들끼리는 주지도 받지도 말자 합의했고, 이웃을 모르고 지내니 명절을 챙길 필요도 없었다. 주지도 받지도 않는 깔끔한 서울 생활이 나는 꽤 좋았다.
정지아 소설가
고향으로 돌아온 뒤 다시 명절을 챙기고 있다. 어린 시절과 달리 이곳에서도 명절 선물 고르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긴요한 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과일이든 생선이든 시골에서도 먹을 것이 더 이상 긴요하지 않다. 대개는 남아돈다. 남아도는 걸 선물해봤자 짐만 된다. 아마 나이 든 친척들에게 제일 긴요한 건 돈일 것이다. 그러나 돈을 드리는 건 어쩐지 선물 같지 않아 망설여진다. 고민 끝에 가까운 분에게는 당신들 돈 주고는 못 사 쓰는 괜찮은 화장품이나 홍삼, 가깝지 않은 분에게는 언젠가는 반드시 쓰게 되어 있는 멸치 정도를 선물하고 있다.

꼭 해야 하는 선물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그리 즐겁지 않다. 해야 하니 부담스럽고 으레 받는 것이라 당연해서다. 아무 이유도 없는데 그냥 생각나서 하는 선물은 하는 사람도 행복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순간에 받으면 받는 사람도 행복하다.

구례 내려와 첫봄, 주인댁 매실밭에 두릅이 흔했다. 서울서는 귀한 것이라 아버지 돌아간 뒤로는 봄이 와도 두릅 맛을 보지 못했다. 신나게 먹다 보니 친구들이 눈에 삼삼하게 밟혔다. 내가 직접 두릅을 따서 스티로폼 상자에 담고 혹 가는 길에 상할까 싶어 아이스팩을 넣어 보냈다. 내 것이 아니라 돈은 들었다. 1㎏에 2만원, 상자값이며 택배비 해봤자 3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주인 땅에 내 돈 들여 묘목을 심어 요즘엔 돈도 들지 않는다. 나물 좋아하는 친구들은 몇 푼 되지 않는 내 선물을 환장하고 좋아한다. 처음엔 뭐하러 고생스럽게 보내냐고 하더니 요즘은 안 보내면 서운해한다. 내가 해마다 아버지가 보낸 온갖 나물을 먹으며 봄을 맞았듯 친구들도 내가 보낸 나물을 먹으며 봄을 맞는 것이다. 친구들은 내가 직접 캐 씻고 삶아서 보낸 취나물이며 머위나물, 된장, 간장을 명품백보다 더 반긴다. 이런 된장 첨 먹어본다고 감탄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따땃하니 풍요로워진다. 이런 게 주고받는 마음이구나 싶다.

돈으로 따지면 사 먹는 게 차라리 쌀 이런 선물들을 받고 나의 지인들은 오래 고민해서 선물을 보낸다. 엄마가 좋아할 것 같은 백화점 과자 같은 것. 시골에 없으면서 엄마나 내가 좋아할 선물을 고르느라 머리깨나 썩였을 것이다. 그중 최고는 후배 소설가 전성태의 선물이었다. 두릅과 대봉을 몇 번 받은 성태가 어느 날 이불을 보냈다. 이불을 선물로 받기는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보자마자 알았다. 성태도 나도 가난한 시골 태생, 엄마 가시기 전에 묵은 솜이불 대신 따시고 가벼운 새 이불 한번 덮어보시라고 보낸 것임을. 이불을 생각해내기까지 성태는 나와 엄마의 사정을 얼마나 살피고 고민했을까? 이런 깊고 다정한 마음, 받아본 사람 있으면 나와보시라! 어찌나 뿌듯하던지…. 물론 나는 그 마음,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부족한 마음이나마 주고받으니 관계는 더욱 끈끈해지고, 마음은 더욱 따뜻해진다.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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