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상과 꿈을 이야기할 용기[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기자 2023. 1. 27.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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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 제로
이거옌 지음·남혜선 옮김
알마 | 472쪽 | 1만6000원

현실 사회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쓸 때 소설이라는 라벨이 작가에게 안전장치가 되어 줄 때가 있다. 누군가가 “당신 지금 감히 우리 사회의 체제를 부정하는 거야?”라고 공격해 올 때 “아니, 이건 그냥 내가 심심풀이 삼아 한 번 상상해본 겁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죠” 하고 한발 물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라운드 제로>의 작가 이거옌은 이러한 안전장치를 단호히 거부한다. 되레 ‘이것은 단지 소설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평행세계’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라운드 제로>는 작가의 자국인 대만에서 원전 사고가 터진 가상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론을 빌려 사고가 터지기 전에는 자신의 소설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불과하지만, 사고 이후에는 ‘이미 일어난 현실’이 될 거라고 이야기한다. 원전 사고가 일어난 현실은 상자 속에 있는 또 다른 현실, 평행세계라는 것이다.

이거옌이 이 소설을 쓸 당시 대만에서는 오래된 핵발전소인 제4원전에 대한 위험성이 대두되어 논란이 큰 상황이었다. 작가는 이런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강렬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듯하다. 고소를 당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사회 주요 인사들의 실명을 그대로 소설에 가져다 쓴 것도 자신의 소설이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사회의 복사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거다.

그래서인지 소설 뒤에 실린 작가와의 대담에서도 이거옌은 용기를 강조한다. 지금 사회에 필요한 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용기라는 이야기인데, 나는 그 대담을 읽으면서 용기라는 말을 가슴에 품고 자국의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는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그려졌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상상하는 동물이라 소설을 쓰면서 이야기 외적으로도 온갖 상상을 한다. 소설이 불러일으킬 논쟁이나 작가 자신이 받게 될 비난 같은 것에 대해서도 지레 겁을 먹는 소심한 인간들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작가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다). 이거옌은 정치인의 이름까지 그대로 썼으니 소설을 쓰는 동안 나름의 각오를 다졌을 것이다. 이걸 발표해서 감옥에 가더라도 나는 옳다고 믿는 것을 하겠다, 그런 생각으로 썼기 때문에 대담의 진행자가 소설을 쓴 이유와 상상의 방식에 대해 질문했을 때 용기가 키워드였다고 대답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독자는 언제나 작가의 예상을 벗어나는 법이다. 독자로서의 나는 작가가 의도한 대로 원전의 위험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긴 했으나, 그보다는 소설에 묘사된 대만의 풍경들에 빠져들었다. 소설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리리칭’이 검은 우산을 펼치고 가랑비가 내리는 타이난의 습하고 어두운 밤 속으로 홀로 걸어 들어가는 대목이나 타이베이 미라마 엔터테인먼트 파크의 대관람차, 이란 현의 항구와 대만 북부 해안…. <그라운드 제로>의 중심 장치는 인간의 꿈 이미지를 스캔해서 프린트하는 ‘꿈 이미지 복원 기술’인데(주인공은 원전 사고에 대한 어떤 진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기억 상실에 빠져 있다. 정부는 그의 잃어버린 기억을 꿈 이미지 복원 기술을 통해 알아내려 한다), 주인공의 꿈 이미지와 대만의 여러 풍경이 교차되는 소설을 읽다보니 당장 대만으로 떠나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하게 솟아올랐다.

그동안 대만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했고,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나 드라마 <상견니>를 재밌게 보기도 했지만 나는 왠지 대만 여행에 대해서는 항상 시큰둥했다. 그런데 대형 재난을 다룬 소설을 읽고 그 풍경에 매료되어 대만에 가고 싶어지다니. 책을 읽기 전에는 예상치 못했던 감상이다. 또 하나 예상치 못했던 감상은 ‘역시 소설을 쓰면서 겁먹을 필요 따위 없다’는 것이다. 이거옌은 비장한 용기를 품고 원전의 위험성을 고발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소설을 썼지만, 나라는 독자는 엉뚱하게도 풍경 묘사에 매료되어 대만 여행의 꿈이나 품게 되지 않았나. 게다가 이거옌은 <그라운드 제로>를 쓰고 감옥에 가는 대신, 이 책으로 중국어권국제SF협회가 수여하는 소설상을 받고 타이베이 도서전 대상 후보작에도 올랐다. 또한 제4원전은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가 상업 운전이 취소되고 후에는 봉쇄되었다고 한다. 수십 년 뒤의 미래를 미리 본 것처럼 정확히 그리는 소설들도 있고, 예견이 빗나가는 소설들도 있다. 눈앞에 떠오르는 미래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SF소설가는 점쟁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그게 꼭 중요한 것도 아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니까. 이거옌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용기다. 작가에게 필요한 용기란 미리 겁먹지 않고 자신의 상상과 꿈을 자신의 방식대로 써 내려가는 것일 터이다.

이종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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