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말로만 ‘법과 원칙’…10명 중 3명은 근로계약서도 못 받아
노동환경·처우 열악할수록 이행률 낮아
“아, 급여명세표? 작은 곳은 원래 안 주는 거야.” 한의원에서 일하는 A씨는 최근 원장에게 급여명세표(임금명세서)를 요구했다가 이런 답을 들었다. A씨는 지난해부터 일해 왔지만 한 번도 임금명세서를 받은 적이 없다. 4대 보험은 얼마인지, 어떤 수당을 받고 어떤 항목이 공제되는지 A씨는 아직 모른다.
성형외과 클리닉에서 일한 B씨는 더 심한 일도 겪었다. 퇴사 후에 급여가 적게 들어와 원장에 문의했더니, 원장은 막말하면서 “세무사에게 전화해서 명세서를 받으라”고 했다. 근로계약서도 받지 못했다.
근로계약서와 임금명세서 작성·교부가 의무화됐음에도 여전히 한국 직장인 10명 중 2~3명은 이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연일 ‘법과 원칙’과 ‘노사 법치주의’를 강조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아주 기초적인 노동법질서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정부가 ‘근로계약서 신고제’ 등 적극적인 조치와 법 위반 엄벌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7일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전국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12월 직장인 인식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27.0%는 근로계약서를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작성했지만 받지는 않았다’가 11.1%였고, ‘작성하지도 않았다’가 15.9%였다.
근로기준법 제17조는 사용자가 임금, 소정근로시간, 휴일, 휴가 등을 명시한 근로계약서를 작성해 노동자에게 교부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를 어기면 500만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태료 처분을 받을 수 있다.
노동환경과 처우가 열악할수록 근로계약서를 받지 못한 비율이 높았다. 근로계약서를 받지 못했다는 응답은 상용직이 20.8%, 비상용직이 36.3%였다. 사업장 규모별로 보면 5인 미만 사업장은 52.5%, 5인~30인 미만 사업장은 25.6%, 300인 이상 대기업은 18.8%였다. 월 임금 150만원 미만에서는 49.2%가 근로계약서를 받지 못했다. 노동조합 가입여부로 보면 노조 조합원은 17.6%, 비조합원은 28.3%로 노조가 있으면 근로계약서 교부 원칙이 더 잘 지켜졌다.
임금명세서도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임금명세서를 받고 있지 않다’는 응답은 23.0%로 나타났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모든 사용자는 2021년 11월19일부터 임금을 줄 때 임금의 구성항목 및 계산방법, 공제내역 등을 적은 임금명세서를 함께 교부해야 한다.
상용직은 11.3%만 임금명세서를 받지 못한 반면, 비상용직은 40.5%가 임금명세서를 못 받았다. 사업장 규모별로 보면 5인 미만은 56.8%, 5인~30인 미만은 28.4%, 300인 이상은 6.1%였다. 특히 숙박·음식점업은 50.0%가 임금명세서를 받지 못했다. 월 임금 150만원 미만 노동자의 미교부 비율은 58.9%로 절반을 넘겼다. 노조 비조합원은 25.4%가 임금명세서를 받지 못한 반면, 조합원은 6.4%에 그쳤다.
현장에는 기초적인 노동법질서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임금명세서 미교부 및 허위 작성에 대한 과태료 부과’에 대해 응답자 56.6%가 ‘모른다’고 답했다.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비율도 22.3%로 나타났는데, 미가입 사유 중 두 번째로 많은 응답이 ‘잘 모르겠음(32.7%)’이었다. ‘법적으로 적용이 안 돼서(39.9%)’의 뒤를 이었다.
정부가 매일 노동현장에서의 ‘법치주의’를 강조하지만, 정작 현장의 기초적인 법과 질서에 대한 감독은 미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권남표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근로계약서 교부 의무는 내 시간을 제공하는 계약의 내용을 서로 알고서 일하자는 취지”라며 “헌법상 국가의 책무는 사람이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것이고 그 기초가 근로계약인데, 이를 민간에 맡겨두고 관리·감독을 제대로 안 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했다.
이어 “사업장이 취업규칙을 노동부에 신고하게 돼 있는 것처럼 근로계약서를 정부에 신고하도록 하면 되는데 그걸 안 한다”며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위반은 엄벌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 조사는 직장갑질119가 여론조사전문기관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지난해 12월7일부터 14일까지 진행했다. 응답자는 경제활동인구조사 취업자 인구비율 기준 비례배분에 따라 수집했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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