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 작성 논문에 대한 제재는 반드시, 언제나, 옳을까

이균성 논설위원 2023. 1. 27.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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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균성의 溫技]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

(지디넷코리아=이균성 논설위원)지식과 문화는 ‘인간의 경험을 재현함으로써 새롭게 창조해낸 결과’다. 이때 경험은 인간 한 명의 개별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누적된 인류의 경험이기도 하다. 그런데 경험을 누적하려면 재현할 수단이 필요하다. 그것이 언어와 그림과 음악이다. 이 세 가지야 말로 인간을 지구상의 모든 동물과 구별 짓는 요소다. 종교 이념 정치 과학 등 인간이 창조한 모든 문명은 이 세 가지를 통해 건설되었다.

문명과 야만의 차이는 그러므로 경험을 재현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그게 있으면 지식과 문화가 축적되는 것이고, 그게 없으면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라는 자연 생태계에 따라 생멸할 뿐이겠다. 경험 재현 능력은 특히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지을 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에서도 차별화의 핵심 요소다. 언어와 그림과 음악에 대한 숙련 정도가 인간의 지위를 결정하는 요소라는 뜻이 된다.

챗GPT(이미지=오픈AI)

공부가 그것이다. 언어와 그림과 음악을 통해 역사 이래 세상의 모든 경험을 축적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 공부다. 이는 곧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과 근육을 동원해 뇌 세포에 더 많은 경험을 입력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입력의 양과 뇌 세포의 타고난 용량 및 훈련 정도에 따라 경험의 재현 능력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재현 능력이 인간 사이의 서열과 지위를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 사이 다툼은 결국 ‘경험 재현 능력’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경험 재현 능력이 곧 기득권이고 그것이 서열과 지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돈 있는 사람들이 강남 8학군으로 달려가는 것도, 의사들이 의대 정원 확대에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것도, 탈레반이 여성의 학습을 금지시키는 것도, 미국이 중국의 첨단 기술 습득을 막는 것도 이치는 다 같다. 이미 정해진 서열과 지위를 지키려는 거다.

영국의 과학 학술지 네이처의 발표는 이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네이처는 지난 24일 "챗GPT(ChatGPT)는 논문의 공동 저자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공식 발표했다. "저자는 연구에 대한 책임이 따르며 AI는 그런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핵심 이유다. 여러 모로 타당하다. 하지만 그 타당성이 언제까지나, 다시 말해 영원히, 유효할 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인간이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인간이 개미나 고양이보다 더 소중한 존재여야 할 이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누구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의 ‘경험 재현 능력’이 더 뛰어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책임 또한 어떤 측면에서 보면 윤리의 문제라기보다 ‘경험 재현 능력’의 문제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게 뛰어난 게 결국은 살아남는다.

네이처 발표의 타당성이 유효한 것은 언어와 그림과 음악을 통해 경험을 재현하고 새롭게 창조해내는 능력이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렇다. 그리고 재현된 경험을 오직 인간만이 심사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그렇다. 문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아니면서 그동안 인간만이 할 수 있었던 ‘경험 재현 및 재구성 능력’을 가진 존재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게 챗GPT다.

의사의 일손이 부족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의사가 해야 할 여러 시술이 알게 모르게 간호사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것도 다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의사들이 의대 정원 확대에 반대하고, 간호사의 권리를 보호할 간호사법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의사를 편드는 이는 드물다. 의사를 편드는 이가 있다면 의사이거나 의사와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다.

챗GPT 시대에는 그런 불편한 억지가 전방위로 확대될 거다. 언어와 그림과 음악을 단련해 경험의 재현 능력을 높임으로써 특정 작업에 사(事)나 사(史)나 인(人)이라는 기득권 장벽을 친 모든 곳이 챗GPT의 공격을 받을 것이고, 그들은 ‘신뢰’와 ‘책임’이라는 문제를 내세워 기를 쓰고 방어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과 싸워 이길 수 있지만, 기계와 싸워 이길 수는 없다. 그게 인간의 역사다.

서구의 역사는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를 갈랐지만 후세의 역사가들은 챗GPT를 기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구분할 지도 모른다. 인간이 아니면서 그동안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었던 ‘경험의 재현 및 재구성 능력’을 가진 존재가 나타났고, 그것은 곧 인간에 의해 구축된 서열과 지위를 송두리째 흔들 새로운 판이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큰판을 누구라서 제대로 알겠는가.

챗GPT에 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나오겠지만 지난 1월6일에 쓴 칼럼 ‘'챗GPT 시대'에 배운다는 의미는 뭔가’에 달린 한 댓글이 잊히지 않는다. “챗GPT는 상위 2,30 퍼센트를 대체하고 하위 7,80퍼센트도 상위 20퍼센트의 실력을 갖춘 듯 꾸며주는 것임.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인지, 무엇을 '교육'해야 하는 지 다시 정의해야함.” 이름 없는 독자지만, 뛰어난 통찰이다.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

이균성 논설위원(sereno@zd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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