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사장님’ 중대재해 면피에 올인…“그 정성으로 안전관리를”

박태우 입력 2023. 1. 27. 05:06 수정 2023. 1. 2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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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처벌법 시행 1년
노동부 감독관들 “기업 ‘면피’ 매뉴얼 대신 ‘안전’ 매뉴얼 만들길”
중대재해처벌법 현장 컨설팅에 나선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서울광역본부 오병한 전문위원(왼쪽)이 지난해 2월7일 오후 서울 구로구 한 건설현장에서 현장 작업자에게 안전수칙 준수 여부 등을 확인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최근 고용노동부 산업안전감독관 ㄱ씨는 중대산업재해인하청업체 노동자 사망사고를 수사하다 황당한 일을 겪었다. 사고를 목격한 하청업체 노동자를 조사하려고 불렀는데, 원청업체가 선임한 대형 법무법인(로펌) 변호사가 함께 온 것이다. ㄱ씨는 25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형식적으로 로펌이 목격자 진술 조력을 위한 선임계를 내지만 하청노동자가 대형 로펌 변호사를 직접 선임할 리가 없지 않은가”라며 “변호사가 목격자를 보호하러 온 것인지 감시하러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목격자가 변호사 눈치만 보고 ‘제가 제대로 답변한 게 맞느냐’고 묻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27일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1년을 맞은 가운데, 이 법 위반 사건을 담당하는 노동부 산업안전감독관들은 대형 로펌을 내세운 기업들의 ‘참고인 말 맞추기’ 등으로 인해 수사에 어려움이 크다고 토로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원청기업이 지배·운영·관리하는 사업 및 사업장에서 발생한 중대재해에 대해 원·하청관계나 종사상 지위와 관계없이 원청기업의 경영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선 ‘을’의 위치인 노동자 혹은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경영책임자가 안전·보건 의무를 다하지 않았음을 증언하기란 쉽지 않다. 또 다른 산업안전감독관 ㄴ씨는 “중대재해처벌법 없이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만 있던 시절에는 (조사 대상이) 변호사와 같이 조사를 받는 사례가 드물었지만 지금은 70~80%가 변호사와 함께 조사를 받는다”며 “피의자의 방어권 행사이지만, 처음 진술을 갑자기 뒤집는 경우도 많아 수사가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산안법에는 사업장마다 지켜야 할 구체적인 안전·보건 조치가 규정돼 있고, 중대재해처벌법은 이러한 조치가 실효성을 지니도록 경영책임자에게 관리·책임을 지운다. 안전·보건 조치 의무 위반이 인정되면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으로 처벌될 수 있기 때문에 기업들은 산안법 위반 혐의도 무죄를 받기 위해 사활을 건다. 산안법만 있던 시절에는 기업 중간관리자가 안전·보건 조치 의무 위반을 스스로 인정해 사건이 빠르게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감독관 ㄱ 씨는 “지난해 말까지 229건의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했고 그 중 11건만 검찰이 기소했는데 재판 진행이 더디다”라며 “산안법만 적용했다면 이러한 사건은 이미 1심이 끝나 벌금형이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들이 산안법 위반 조사에서 무혐의를 받기 위해 ‘고의가 없었다’ ‘중간관리자가 보고받지 못했다’며 계속 다투고 있어 수사가 지연되는 점이 없지 않다”고 덧붙였다.

현재 기업들이 수사과정에서 가장 많이 다투는 것은 중대재해처벌법 처벌 대상이 되는 ‘경영책임자’가 누구인지다. 안전보건최고책임자(CSO)를 선임한 기업들은 노동부가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 또는 이에 준하여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을 뜻하는 경영책임자를 ‘대표이사’로 보고 수사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며 ‘안전보건최고책임자도 경영책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검찰이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입장을 명확하게 표명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일부 검사들이 학술대회·토론회에서 이 법의 위헌성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룡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형법)는 지난해 12월 발표한 ‘중대재해처벌법의 산업재해시사상죄의 성립요건’ 논문에서 “사적 견해라고는 하지만, 현직 간부 검사들이 법률의 위헌 가능성을 언급하는 상황에서 수사지휘와 관련해 명확한 검찰의 입장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산업안전에 잔뼈가 굵은 감독관들은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기대하거나 법 자체가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기업들에게 ‘재해예방에 더 노력해줄 것’을 당부한다. ㄱ씨는 “중대재해처벌법이 규정한 기업 의무는 10년 전부터 있던 것이고, 안 하던 것을 새로 하라는 게 전혀 아니다”라며 “어떤 기업은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어떻게 면할지 매뉴얼을 만들고 대형 로펌 자문을 받던데, 대표이사(경영책임자)의 처벌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으로 사업장의 안전 위험을 제거할 매뉴얼을 만들면 좋겠다”고 말했다. ㄴ씨도 “기업들이 중대재해처벌법을 가족과 동료를 지키는 법이 아니라 대표이사를 처벌하는 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안전 관리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처벌을 면할) 페이퍼워크에 투자하고 있다”며 “페이퍼 만드는데 들어가는 에너지를 안전관리에 투자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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