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엽의고전나들이] ‘우연’의 효용

2023. 1. 26.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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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에든 '대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시인이라면 그의 시에는 허접한 것이 없다.

그가 화가라면 사인을 마친 완성작은 말할 것도 없고 미완성작마저 높은 수준의 예술품으로 평가된다.

요행히 잘 됐을 뿐 아직 실력이 대단한 것은 아니라 판단했고 그 뒤로 더욱 성실하게 공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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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에든 ‘대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시인이라면 그의 시에는 허접한 것이 없다. 그가 화가라면 사인을 마친 완성작은 말할 것도 없고 미완성작마저 높은 수준의 예술품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어디까지나 대가에게서나 가능한 법. 범인들로서는 언감생심이다. 간혹 득의만만한 작품을 한 편 내고 기고만장하다가 이내 범작(凡作)을 내고 기가 눌리기 십상이다.

고려에서 조선을 잇는 문호인 이색(李穡)의 ‘송씨전’에는 기이한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 송씨는 책을 쌓아두고 손님들을 불러 모아 글을 짓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수준이 고르지 못해서 어떤 글은 사람들을 놀랠 만큼 빼어났지만, 또 어떤 글은 웃음을 살 정도로 졸렬했다. 그럴 때마다 송씨는 기뻐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았다. 잘 지은 글에 대해서도 “우연히 좋은 글귀를 얻었을 뿐, 잘 지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뒤로 빼고, 못 지은 글에 대해서도 “우연히 서툴게 된 것이지, 서툴게 지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며 담담해했다.

이색은 그런 송씨가 자신의 문학적 성취에 지대한 공을 했다고 밝혔다. 이색이 소싯적에 송씨를 찾아가 놀며 시를 배웠는데 송씨가 과거 보기를 권했다. 마침 이색의 아버지는 중국에 있었고, 어머니는 그의 학문이 미천한 걸 아는 터라 극구 말렸다. 그러자 송씨가 나서서 종이를 사다 주며 과거보기를 권했고, 이색은 급제했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부터였다. 송씨가 그랬듯이, 이색 또한 과거의 급제를 우연으로 여겼다. 요행히 잘 됐을 뿐 아직 실력이 대단한 것은 아니라 판단했고 그 뒤로 더욱 성실하게 공부했던 것이다.

어떤 일의 성패를 우연으로 여길 때, 거기에는 양날의 칼이 숨어 있다. 잘 되든 못 되든 우연히 벌어진 일이니 되는 대로 살자는 것이 한쪽 날이라면, 잘 되어도 아직 부족하니 노력하고 못 되어도 크게 낙담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이 또 다른 한쪽 날이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성과주의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시대를 살게 됐고, 어떤 한 가지 일에서의 성공과 실패가 곧 온 생애의 성패인 양 과민하게 반응하곤 한다. 그러나 작은 성패에 일희일비하여 쓴맛을 보게 될지, 담담히 받아들여 크게 성장하는 발판을 삼을지는 오직 각자의 선택이다. 이 점에서 대가들이란 어쩌면 시행착오를 가장 격렬하게 치러낸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이강엽 대구교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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