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칼럼] ‘늙음’이라는 타자

한겨레 2023. 1. 2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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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칼럼]하얀 천에 뚝뚝 떨어진 ‘늙음’이라는 검은 얼룩이 서서히 번져 나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 50대 무렵의 나는 고령자의 ‘타자’로, ‘타자’로서의 노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내 몸에 ‘늙음’이라는 낯선 타자가 끼어들어 와 나의 내부를 침식하고 있다고 느낀다.

서경식 | 도쿄경제대 명예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

내가 지금 와 있는 일본 나가노현은 몹시 춥다. 창 바깥에는 눈이 기다리고 있다. 일기예보는 내일 영하 15도까지 기온이 내려간다고 한다. 엄동의 일본에서 독자 여러분에게 새해 인사를 드린다. 부디 평화로운 한해 보내시기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벌써 1년이 다 돼가고 있다. 전투는 아직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오래 이어질 것이다. 물론 그동안에도 일반 민중의 희생은 거듭됐다. 내 뇌리에는 ‘관리된 전쟁’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관리된 채 전쟁이 계속되는 것은 각국 정부와 군·산·학 및 금융자본 공동체엔 다시없을 좋은 상태일 것이다. 구미(일본 포함)의 기본자세에는 전투 범위를 우크라이나 영역 안으로 한정하고 자국 병사 등의 직접적인 희생은 극력 피하면서 지금의 상태를 오래 끌고 가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전시’ ‘비상시’를 구실로 일반 대중을 사고정지 상태로 몰아가 오래된 난제를 단숨에 처리할 태세다. 일본의 예를 들자면, 지금 정부가 추진하려는 방위비(군사비) 대폭 증액을 증세로 충당하려는 정책이나 원전 재가동과 신축 방침 등이 대표적이다. 지금까지 가까스로 유지돼온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가 크게 손상되고 있다. 전세계가 반동기에 들어간 듯하다. 그런 세계적 대반동의 시기에 일본은(한국도) 저출산 고령화 시대를 맞았고, 나 자신도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이번 칼럼 마감을 눈앞에 두고, 빨리 저녁밥을 먹고 책상머리에 앉아야지 생각하며 입속의 음식물을 씹고 있는데, 또 이가 빠졌다. 아래턱 쪽 앞니다. 예전에 이 칼럼난에 ‘이빨 빠진 2020년 연초의 소감’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게 문득 생각났다. 그때로부터 꼭 3년이 지났고, 나는 그만큼 착실하게 나이를 먹었다. 이제 내게 남아 있는 이빨의 수는 빈약하다.

자동차에 오래 앉아 있으면 다리와 허리가 경직돼 아프기 때문에 전차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 늘 약속시간에 늦지 않을까 당혹스럽다.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 계산을 잘 못하는 것이다. 거기까지라면 45분이면 충분할 것으로 자신했으나, 그것은 아직 젊었을 때의 기준이 갱신되지 않은 채로 있었기 때문이다. 환승 등으로 서둘러 달려가려 하지만 제대로 달릴 수 없고 자칫 넘어질 것 같다.

정신이 깜빡깜빡한다. 휴대폰, 안경, 읽던 책…. 끊임없이 뭔가를 찾고 있다. 요즘은 마스크다. 찾아 헤맨 끝에 대부분의 경우 내 턱밑에 있는 그걸 발견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뭔가를 찾으면서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생각해 내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앞으로는 내가 누구였는지 생각해 내지 못해 “나는 누구지?” 하고 물을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화를 잘 낸다. 특히 컴퓨터나 휴대폰을 쓸 때 잘 다룰 줄 모르는 건 물론이고 그 세계에서 유통되는 언어 자체에 소원하기 때문에 마음이 엄청 상한다. 자신의 패스워드(암호)를 잊어버리고, 신용카드 결제도 마음대로 안 된다. 그런 자신에 대한 화를 참지 못한다. 하얀 천에 뚝뚝 떨어진 ‘늙음’이라는 검은 얼룩이 서서히 번져 나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20년쯤 전에 독일의 뮌스터라는 도시에 갔을 때 공영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할 때마다 차체를 기울이는 모습을 처음 봤다. 승객, 특히 고령자가 부담 없이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였다. 나와 아내는 거기에 감동해서 우리가 사는 일본의 도시에도 이런 장치가 빨리 보급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얘기했다. 그 얘기를 했을 때는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없이 고령자나 약자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 뒤 어느 사이엔가 그런 기울어지는 승하차 버스는 일본에도 꽤 보급됐다. 지금은 그 버스를 환영하면서 감사히 노약자석에 앉게 됐다. 50대 무렵의 나는 고령자의 ‘타자’로, ‘타자’로서의 노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내 몸에 ‘늙음’이라는 낯선 타자가 끼어들어 와 나의 내부를 침식하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예전에 이 기간을 초로기에서 노년기로의 이행기라고 형용했는데, 그 ‘이행’의 난처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평온한 노년기를 조용히 즐기기는커녕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절박감과 그런 의지에 심신이 따라주지 않게 된 것에 대한 초조감이 끊이지 않는다.

‘노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어린이나 젊은이를 두고서는, 실제로 그것이 어느 정도 유효하게 실행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말이 상투구로 쓰인다. ‘노인’은 어떨까? “여러분 덕택에 지금이 있다”는 미사여구가 있지만, 거기에는 이미 ‘생산력’으로 계산되지 않는 존재에 대한 온정주의적 ‘책임’론, 어쩌면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는 ‘짐’이라는 함의가 들어 있지 않을까? ‘노인’은 자신들을 폐기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온정에 기대어 생명이 다하기를 얌전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나는 이런 압력에 가능한 한 저항하려 한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말에는 ‘생산력’이라는 매직 워드(주문)가 숨어 있다. ‘투자’에는 이윤을 올리는 것이 전제돼 있다. 즉 모든 것을 재는 척도는 ‘이윤’인 것이다. ‘노인’은 이윤 획득에 봉사하면서 자신에게 아직 ‘생산력’이 남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의 시야, 즉 ‘생산력’이나 ‘이윤’이라는 척도로는 잴 수 없는 가치를 꺼내 보여야 한다.

일본의 대표적 전후 지식인인 가토 슈이치는 일찍이 사회운동의 ‘노학공투’(老學共鬪)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일본 사회의 성인 남자 대부분은 회사라는 조직에 얽매인 ‘회사인간’이다. 이래서는 그들이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 한편 아직 ‘회사인간’이 되지 않은 학생은 비교적 자유롭게 발언하고 활동할 수 있다. 정년퇴직해 회사의 굴레에서 해방된 노인에게도 그런 가능성이 있다. 젊은이들의 활동에 ‘해방된 노인’이 합류해 함께 싸우면(공투), 일본의 사회운동에 새로운 희망이 싹트지 않겠는가. 기억에 따르자면, 대체로 이런 취지였다. 1970년대 일본 사회가 탈정치화의 비탈길로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했을 무렵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해방된 노인’들이 일어서서 이런 현상에 돌 하나를 던진다는 꿈, 일종의 우화다. 현실에서 다수 젊은이는 자진해서 ‘회사인간’이 돼 안정을 얻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삼고 있다. 가토의 노학공투는 흥미진진한 꿈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런 우화를 나도 얘기하고 싶다. 젊은 사람들이 말하려 하지 않는 꿈, 다른 인생의 꿈을 제시하는 것, 그것 또한 노인에게 가능한 사회공헌이다.

내 속에서 자라고 있는 ‘늙음이라는 타자’와 끈질기게 사귀고 대화해 나갈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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