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한바탕 활극이 끝나고 난 뒤엔

이지혜 2023. 1. 2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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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서울경기지역본부가 찬반투표로 파업철회결정을 내린 지난해 12월9일 오후 경기도 의왕ICD 제1터미널 인근 사무실 앞에서 노조원들이 해산결정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지혜 | 경제팀 기자

한때는 ‘악당을 과감히 비판하는 용기’가 좋은 기자의 덕목인 줄만 알았다. 결연히 떨치고 일어나 그릇된 행동을 하는 악당들에게 일침을 놓고 싶어 기자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막상 기자가 된 뒤에 깨달은 건 ‘악당에게 일침 놓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작든 크든, 실수든 고의든, 언제 어디에나, 지적할 거리는 널려 있다. 정부 부처든 정치인이든, 악당의 힘이 셀수록 일침의 정당성도 커진다. 심지어 그 악당이 노동조합이나 검찰, 언론, 혹은 사이비 종교단체처럼 인기 없는 쪽이라면 박수도 받을 수 있다. 문제 해결까지 못 가도 적당히 정의로워 보인다. 선명한 악당들만 골라서 일침이나 놓고 다니면 금방 ‘참기자’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남는 장사다.

세상이 영웅과 악당으로 선명히 나뉘는 삼류 활극 영화라면 포스터만 보고도 악당을 금방 골라낼 수 있고, 그 악당만 혼내주면 해피엔딩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활극 너머를 자세히 보고 있자면 악당인 줄 알았는데 악당 아닌 이도 있고, 악당이 맞긴 한데 악당 탓만 하자니 가혹할 때도 있고, 더 큰 악당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나에게는 잘잘못을 딱 자르기 어려운 회색 지대를 직시하는 일이 ‘일침 놓기’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혼란의 틈에서 답 없는 질문을 건져내는 일이나 나중에 오답이 될 수도 있음을 감수하며 오늘의 답변을 조심스레 써보는 일에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건 박수 받는 일도 아니다. 누군가를 잡아다 족쳐도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냉담한 진실을 마주하는 일이다.

요즘 정부가 화물연대의 총파업을 대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악당 찾기, 남는 장사다. 정부는 ‘법치주의’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둘러 화물연대를 악당 역할에 점지했다. 대충 들으면 그럴싸하다. 화물연대는 노동조합법상 노조가 아니고, 화물운송 기사들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닌 탓이다. 처음엔 국토교통부가 화물연대 파업 때문에 “국가경제에 매우 심각한 위기”가 온다며 업무개시명령으로 겁박하더니, 이제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나서서 화물연대 파업을 사업자의 담합으로 규정하고 조사를 해보겠단다. 얼마 전엔 조사방해행위로 검찰 고발까지 했다.

화물연대를 굴복시켜, 활극은 끝났고 대통령 지지율이 올랐다. 남은 자리엔 우리 사회가 아직 답하지 못한 중요한 질문들만 쓸쓸히 앉아 있다. 왜 화물운송 기사들은 사실상 노동자처럼 일하면서 노동법의 보호를 못 받는지. 화물운송 기사들이 단 며칠만 일손을 놓아도 나라 경제가 휘청인다면서, 그렇게 중요한 사람들이 어째서 이리 박한 대우를 받는지. 왜 화물운송 기사들은 20년째 같은 요구를 하고, 처우는 점점 나빠지는지. 이 거대한 모순은 어디에서 막혀 해소되지 않는지. 가만 보면 세상에 법치주의만큼 쉬운 게 없다. 고민도 딜레마도 없이 법에 적힌 대로 처벌할 사람만 찾으면 되는데, 대통령은 왜 필요하고 장관은 왜 필요할까.

이 세상은 영웅과 악당이 명확히 나뉘는 활극이 아니고, 활극이 끝나도 세상은 미련하게 이어진다. 짧다면 짧을 6년간 기자생활 경험칙에 따르면 계속 악당만 찾아다니고 일침 놓기에 열 올리는 사람들은 대안 마련에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들에게는 건설적 미래를 만드는 일보다 정의로움을 뽐내는 일이 더 중요해 보인다. 어쩌면 악당을 무찌르는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아무에게나 악당 역할을 점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악당 찾기에만 몰두하면 당연히 좋은 대안이 나올 리 없다. 범인을 정해둔 채 시작한 수사처럼 말이다. 이미 정부가 대안으로 내민 ‘표준운임제’는 화물운송 기사들을 무시하고 철저히 화주 편에서 만든 반쪽짜리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부 안은 화물연대가 악당 역할을 맡은 활극에서는 제대로 기능할지 몰라도 진짜 세상에선 턱도 없다. 정부가 자꾸 중요한 질문을 외면하고 ‘악당 잡아라’만 외치는 한, 우리는 몇년 뒤 또다시 파업에 나선 화물연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대체 진짜 악당은 누구일까.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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