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무질 ‘문 닫았다’는 ㅁ일보 논설위원님께 [전범선의 풀무질]

한겨레 2023. 1. 2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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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선의 풀무질]80년대 사회과학 서점의 추억은 작당 모의에 있었다.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서 더 나은 세상을 꿈꿨다. 물론 풀무질에서 더 이상 엔엘(NL·민족해방)과 피디(PD·민중민주)가 혁명을 계획하지는 않는다. 대신 에이엘(AL·동물해방)을 주장하는 청년들이 모여 삼삼오오 워크숍과 세미나를 연다.
2020년 5월16일 서울 종로구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에서 한국 동물당의 필요성과 사례를 토론하는 ‘지금, 동물을 위한 정치가 필요하다’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동물해방물결 제공

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지난주에 황당한 기사를 읽었다. <문화일보> 이현종 논설위원은 ‘문재인의 책방’이라는 칼럼에서 사회과학 서점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80년대 대학가에는 “빨간 책”을 팔면서 운동권 학생의 아지트 역할을 하는 책방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문재인 전 대통령이 양산 평산마을에 책방을 열기로 했다. 친문 계파가 모이는 정치적 공간이 될 것이 뻔하다. “잊혀진 삶을 살겠다”는 전직 대통령의 행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이 글의 요지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잘못 알렸다. 이 위원은 과거 유명했던 대학가 인문사회과학 서점을 차례로 읊었다. 서울대 앞 ‘광장서적’,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이 운영한 ‘대학서점’, 김부겸 전 총리가 운영한 ‘백두서점’, 연세대 앞 김영환 충북지사와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동 운영한 ‘알서림' 등. 87년 6월 항쟁 당시 서강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이 위원에게는 친숙한 이름일 것이다. 끝으로 또 하나의 추억을 호출했다. “사회과학 서점의 마지막인 성균관대 앞 ‘풀무질’이 지난 2019년 문을 닫으면서 이젠 대학가에 사회과학 서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나는 <한겨레>에 ‘전범선의 풀무질’을 벌써 4년째 쓰고 있다. 서점 풀무질은 나와 동지들이 2019년 은종복 전 대표님께 물려받아 멀쩡히 잘 이어가고 있다. 장경수, 고한준, 홍성환, 지금은 김치현이 매일 문을 열고 자리를 지킨다. 오후 1시부터 10시까지 불을 밝힌다. 풀무질은 문화일보 쪽에 정정을 요구했으나 아무런 조처가 없었다. 언론중재위에 정정보도와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위원은 글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믿는다. 칼럼을 쓰다 보면 나도 팩트를 틀릴 때가 있다. 대부분 한겨레에서 바로잡아 주신다. 실수하면 사과하고 고치면 된다. 그런데 일주일째 묵묵부답이니 실망스럽다. 문재인을 비판하기 위해 풀무질을 죽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최대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 본인이 생각하는 사회과학 서점 기준에 풀무질이 더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인가? 운동권이 모여서 “빨간 책”을 읽어야 진정한 사회과학 서점인데, 그렇지 않아서 안 쳐주는 것인가? 선배가 후배를 데려와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 ‘의식화 필독서’를 사주는 그런 정겨운 곳이 그리울 수 있다.

풀무질의 베스트셀러는 더는 리영희가 아니다. 우리가 인수한 뒤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서가 정비다. 노동해방, 민족해방, 민중해방과 관련된 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빨간 책” 옆에 “보라 책”을 두었다. 여성해방, 성소수자해방 관련 서가다. 장애, 청소년, 난민 등 다른 소수자 인권도 다룬다. 그 옆에 “초록 책”을 보강했다. 동물해방, 기후·생태위기 등 녹색운동 관련 서가다. 오늘의 풀무질은 적녹보가 무지개처럼 어우러진다. 비거니즘, 페미니즘, 에콜로지를 비롯해 21세기가 요청하는 담론으로 판올림했다. “사상의 불을 지피는 책방”으로서 인문학, 사회과학 전문서점의 명맥을 당당히 잇고 있다.

80년대 사회과학 서점의 추억은 작당 모의에 있었다.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서 더 나은 세상을 꿈꿨다. 물론 풀무질에서 더 이상 엔엘(NL·민족해방)과 피디(PD·민중민주)가 혁명을 계획하지는 않는다. 대신 에이엘(AL·동물해방)을 주장하는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워크숍과 세미나를 연다.

풀무질은 지난해 동물권단체 ‘동물해방물결’과 한 살림을 꾸렸다. 2017년 동물해방과 종차별 철폐를 내걸고 비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발족한 단체다. 솔직히 도서 판매만으로는 책방을 유지하기 힘들다. 종이책 수요가 너무 적다. 하지만 운동권 아지트로는 제격이다. 원래 풀무질의 존재 이유다. 동물해방물결은 최근 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월리의 폐교를 임대해 축산 동물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곳에 생명평화교육을 위한 ‘인제 풀무질’도 만들 계획이다. 풀무질은 죽기는커녕 불씨가 커지고 있다.

문화일보는 오보를 정정해주길 바란다. 이 위원은 풀무질에 한번 모시고 싶다. 80년대를 생각하면 낯설 수 있다. 책도 바뀌고 사람도 바뀌었다. 그러나 해방세상을 향한 열망은 같다. 책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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