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 한마디 없어도 서정미·애상 ‘가득’ [이 남자의 클래식]

2023. 1. 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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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학 시절의 일이다.

독일인 교수에게 공손하게 그러나 영혼 없이 무심코 던진 인사말 한마디가 불친절하고 심드렁하게 전달된 것이었다.

보칼리제의 사전적 의미는 '모음창법'으로, 별도의 가사 없이 허밍이나 '아에이오우' 같은 모음으로만 부르는 일종의 성악 연습곡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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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남자의 클래식 - 라흐마니노프, 보칼리제 34-14
성악 연습곡으로 유명해져
프레이징과 셈여림만 표기
깊고 오묘한 정취 자아내

독일 유학 시절의 일이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독일인 교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그는 반가운 답례 대신 자못 진지한 표정과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와 내게 말했다. “헤이, 우성! 넌 왜 항상 같은 목소리, 같은 톤으로 인사를 하지?” 친절하지만 매우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안녕이 있다네. 네가 굉장히 예의 바른 한국인이라는 건 잘 알아. 하지만 그것보단 난 네가 오늘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는지, 혹시 실연의 아픔에 밤새 술이라도 마셨는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그런 것들에 더 관심이 많다고.”

독일인 교수에게 공손하게 그러나 영혼 없이 무심코 던진 인사말 한마디가 불친절하고 심드렁하게 전달된 것이었다. 필자는 이날 목소리의 힘이 생각보다 세다는 것과 세심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 한마디의 목소리가 나의 감정을 왜곡시킬 수도, 상대방에게 접근 불가한 울타리를 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서양인들은 비교적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다양한 표정과 억양, 뉘앙스로 목소리에 마음을 담아낸다. 자신의 생각을 적절히 말하지 않거나,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감추려 드는 사람을 점잖다고 여기기는커녕 불친절하고, 지적이지 못하다고 여긴다. 심지어 대인 관계에 폐쇄적이며 심각한 성격 장애자처럼 여기기도 한다.

필자는 건강한 목소리를 갖고서도 정작 친절함과 반가움을 전달하는 목소리를 내는 데는 인색했던 것이다. 때론 공손한 척 때론 위엄있는 척 연기하고 있는 내 목소리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상대방에게 친절한 칭찬 한마디를 건넬 때도 목소리 칭찬은 매우 효과적이다. “목소리가 참 좋으세요”라는 칭찬은 “목소리가 울림통이 좋아서 그런지 제 별명도 동굴입니다”라든가 “네. 어려서부터 소프라노 해도 되겠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등의 매우 구체적이고 긍정적인 리액션을 불러일으킨다. 설령 목소리가 허스키하고 맑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목소리 칭찬엔 뿌듯해하는 눈치다.

목소리는 여러 조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피가 잘 도는 싱싱한 성대도 필요하고, 빵빵한 호흡을 위한 넓은 가슴, 생동감 있게 발음할 수 있는 턱과 입술도 중요하다. 그러나 목소리의 울림보다 더 중요한 건 필자의 유학 시절 노 연출가가 지적했듯, 마음에서 우러나와 진심이 느껴지는, 감정이 배어 있는 언어와 말투다.

1873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943년까지 살았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작품 외에도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보칼리제(Vocalise)’라는 성악 작품이다. 보칼리제의 사전적 의미는 ‘모음창법’으로, 별도의 가사 없이 허밍이나 ‘아에이오우’ 같은 모음으로만 부르는 일종의 성악 연습곡을 말한다. 성악곡에 가사가 없다는 것이 독특하다.

혹자는 노랫말이 없으니 단순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보다 깊은 해석과 고도의 표현력이 요구되는 작품이다. 보통의 가곡들은 시어(詩語)에 목소리로 음색이 더해져 구체적 표현이 이루어지지만 이 작품은 기악곡처럼 프레이징과 셈여림만으로 추상적 감상을 자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작품은 내면의 자태를 드러내듯 가사 한마디 없이 서정미와 애상으로 가득하다. 단순한 멜로디는 감성이 넘쳐흐르는 화성의 반주와 대비를 이루며 깊고 오묘한 정취를 자아낸다.

안우성 남자의 클래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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