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에 빠졌어요] 키 179cm 폴란드 아가씨 "선자령에서 모델 스트레스 날렸죠"
"봄날, 꽃 대신 폭설 내리는 강원도 산간 폭설캠핑! 눈썰매 타고 가는 산!"
푸른 눈의 여인이 눈 내리는 만항재를 오른다. 커다란 배낭을 썰매에 싣고 순백의 운탄고도를 홀로 걸어간다. 눈을 밟아 바닥을 다지고 능수능란하게 텐트를 친 뒤 위스키 한 잔으로 추운 몸을 녹인다.
영상 속의 주인공은 폴란드 출신의 안나 피트카Anna Pytka씨.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코리안사파리KoreanSafari'에는 대관령, 무의도, 민둥산 등 국내 백패킹 명소에서 촬영한 영상이 여럿 올라와 있다. 안나씨의 본업은 유튜버가 아닌 모델. 한국에서 처음 등산을 접했지만 지금은 백패킹 유튜버가 되어 TV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키 175cm 마른 체형에 초록색 눈이었어요. 지금은 키가 더 커서 179cm예요."
축복받은 체형을 타고난 안나씨는 얼떨결에 모델이 되었다. 폴란드 작은 마을의 평범한 소녀였던 그는 타고난 신체 덕분에 주변에서 모델 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17세 때 사촌이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안나씨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 모델 에이전시에 보냈는데 이게 웬걸, 에이전시에서 계약을 하자고 연락이 왔다. 안나씨는 그길로 모델이 되어 2주 뒤 런던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현재 모델 활동 15년차인 그는 일 때문에 세계 곳곳을 다녔다. 한국에도 몇 번 온 적 있었지만 오래 머물진 않았다. 안나씨가 본격적으로 한국 생활을 시작한 건 2019년부터다. 한국에 오고 얼마 안 지나 코로나가 퍼지는 바람에 해외로 나갈 수 없게 된 것. 그는 현재 한국에서 패션·광고 모델로 활동 중이다.
유튜브 때문에 시작한 등산
"저는 원래 산보다 바다 스타일의 사람이었어요. 산을 오르며 땀 흘리는 것보다 바다에서 선탠하는 걸 좋아했어요. 피곤한 게 싫어서 운동도 잘 안 했어요. 운동을 안 해도 신진대사가 활발해서 모델 활동하는 데 문제가 없었어요."
안나씨는 한국에 오기 전에 한 번도 등산을 해본 적 없었다. 폴란드에는 한라산보다 높은 산이 많지만 밑에서 구경만 한 게 다였다. 그랬던 그는 코로나 이후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집에만 갇혀 있어 답답하던 찰나에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해 보고 싶었다. 마침 주변 친구들이 안나씨에게 유튜브를 하면 재밌을 것 같다고 말했다.
"2021년에 유튜브를 시작했어요. 초창기에 심마니를 따라서 산에서 버섯을 찾아다니는 콘텐츠를 했어요. 아주 피곤했지만 흥미롭고 재미있었어요. 그때 영감을 얻어서 대표님이 백패킹 콘텐츠를 해보자고 했어요."
심마니 콘텐츠 이후 촬영을 도와주던 모델 에이전시 대표님이 안나씨에게 백패킹 콘텐츠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대표님이 백패킹 마니아였기 때문에 안나씨는 수월하게 등산에 입문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많은 산을 가봤는데 복잡한 이름 때문에 까먹은 게 많아요. 가장 기억나는 산행은 선자령입니다. 유튜브 시작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등산이었어요. 한겨울 영하 25℃였는데 산에 갔을 때 충격 받았어요.
큰 배낭을 멘 채로 '안나, 도대체 산에서 이걸 왜하는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춥고 피곤했어요. 그런데 정상에 도착해 보니 너무 행복했어요. 하산하고 나서 더 기분이 좋았고 스스로가 자랑스러웠어요.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어요. 또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중독된 것 같았어요."
선자령에서의 혹독한 신고식 이후 안나씨는 산에 빠졌다. 이후 산은 그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모델로 살면서 압박이나 스트레스를 많이 느꼈는데 산에 오르면 해소되는 느낌이에요. 산에서 배터리가 충전되는 것 같아요."
안나씨는 선자령을 시작으로 만항재, 마니산, 노고산, 민둥산 등 한국에서 백패킹으로 유명한 곳을 여럿 올랐다. 그의 유튜브 채널에는 등산 이외에도 태권도 배우기, 막걸리에 홍어 먹기, 도자기 만들기 등 한국 문화를 체험하는 콘텐츠도 있다. 이러한 독특한 이력 덕분에 MBC 에브리원 예능 프로그램인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 출연하기도 했다. 방송에서 여수 개도로 백패킹을 떠났는데 낚시가 뜻대로 되지 않자 자연스레 한국어 욕이 입 밖으로 나왔다. 이 때문에 안나씨는 '폴란드 식빵 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폴란드보다 한국이 더 가깝게 느껴져
"한국 산은 질감이 다양하고 쉬운 산이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산에서 5세부터 90대까지 다양한 나이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요. 한국 사람들은 등산을 사랑하고 항상 공손해요. 산에서 만나면 얼굴에 미소를 띠고 '안녕하세요'라고 말합니다."
아직 한국에서 지낸 시간이 길지 않고 한국어가 서툴지만 안나씨는 앞으로 한국에서 계속 살 계획이다. 한국은 폴란드에 비해 여러모로 살기 좋은 곳인데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폴란드에서의 삶이 더 척박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조금 힘들었어요. 한국과 폴란드의 라이프스타일은 완전히 달라요. 폴란드 음식도 그리웠고 부모님도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폴란드보다 오히려 한국이 더 가깝게 느껴져요. 한국 문화와 음식과 사람들이 좋아요."
안나씨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닭발, 오돌뼈, 닭똥집, 순대와 같은 전통 음식이다. 그는 "가장 이상하게 생긴 음식들이 가장 맛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여행을 좋아하게 된 것도 특색 있는 지역음식을 맛볼 수 있어서다.
앞으로 안나씨가 한국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한국 문화를 알리는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이다.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하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자기 모습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모델은 영원한 일이 아니에요. 저는 대사 외우는 게 힘들어서 배우가 될 수도 없어요. 저는 제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싶어요. 유튜브 활동하며 팬들도 많이 생겼고 좋은 댓글 달아 주는 것도 좋아요. 산이 제 삶을 크게 바꿨고 많은 기회를 줬어요. 앞으로 제가 하는 활동이 더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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