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이은 예술의 혼, 진도 '소치 일가 5대 미술관'

정은주 2023. 1. 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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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가가 5대에 걸쳐, 그것도 직계 자손들이 화가를 업으로 삼은 건 세계 미술사에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 선생의 집안이 그렇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나선 후손들이 20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화맥을 이어가고 있다. 예향의 고장 진도에 소치 일가의 예술혼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소치 기념관을 재단장한 소치 1관

진도의 명소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은 소치 허련 선생이 말년을 보내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이다. 지난해 이곳에 '소치 일가 5대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소치 선생과 직계 후손들의 작품들을 전시하며 두 개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소치 1관은 허련 선생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으며 소치 2관은 2대부터 5대까지 후손들의 작품 10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소치 1관은 기와를 얹은 전통 건축물로 기존 소치 기념관을 재단장했다. 소치 선생의 작품들만 모아 놓았으며 약 40여 점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노송과 모란, 사군자, 괴석 등 잘 그렸던 그는 특히 산수화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짙은 먹과 마른 붓을 번갈아 쓰는 자유분방한 붓질과 많은 여백, 독특한 색감들이 도드라지게 다가온다.

소치를 논할 때 추사 김정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30살이 될 무렵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나갔으며 이때 남종화의 화법과 정신을 익혔다. 이후 자신만의 시서화를 완성하며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진다. 추사는 소치의 그림을 두고 ' 압록강 동쪽에서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며 극찬을 마지않았는데 소치 또한 일평생 스승을 극진히 모신 것으로 유명하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었을 때는 세 번이나 바다를 건너 그를 찾아가기도 했다.

●미디어 아트와 포토존이 있는 소치 2관

진도 역사관을 개보수한 소치 2관은 현대적인 건축물로 1관과 대비를 이룬다. 가장 먼저 소치 선생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미디어 아트와 대나무 정원을 테마로 꾸민 홀로그램 포토존이 눈길을 끈다. 벼루와 붓이 단정히 놓인 탁자 앞에 앉아 있으며 바람결에 흔들리는 숲에 들어온 듯 마음이 정갈해진다.

이머시브룸은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실감형 미디어 아트 공간이다.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과 바닥에 사계절 변화하는 풍경이 음악과 함께 펼쳐진다. 벽면을 터치하면 꽃이 활짝 피어나고 황금빛 나비 떼가 몰려오는 등 영상 속에 흠뻑 빠져든다. 마치 입맛을 돋우는 전채 요리처럼 화려한 미디어 아트가 본 전시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전시관은 소치 허련 선생의 직계인 2대 미산 허형과 3대 남농 허건, 임인 허림, 4대 임전 허문과 5대 오당 허진 등의 작품들을 세대 순으로 감상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미산은 소치 선생의 막내아들로 후손들이 가업을 이어가는 가교 역할을 했는데 아버지와 비슷한 화풍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특히 <묵매>와 같은 사군자들이 일품이다.

●200년을 넘나드는 예술 테마 시간 여행

미산의 두 아들인 남농과 임인은 엄혹한 시기에도 각자의 방식대로 예술혼을 꽃피웠다. 남농은 남종화에서 나아가 신남화라는 새로운 화풍을 고안했으며 한국 화단에 여러 업적을 남겼다. 임인은 토점화라는 독창적인 화법을 만들어냈다. 그는 일본 화단에서 천재 화가라는 찬사까지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20대에 요절했다. 대신 소치 일가의 화맥을 잇는 임전 허문을 남겼다.

임전은 구름과 안개가 주제인 운무산수화라는 몽환적인 세계를 창조해 냈다. 그래서 '안개 작가'라고도 불린다. 그의 작품은 오묘한 흡인력이 있다. 화폭에 담긴 산과 숲, 절벽, 폭포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금세라도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마치 꿈을 꾸는 듯 한참을 그 앞에 서서 떠나지 못한다. 80세가 넘은 노화백이지만 지난해에도 개인전을 여는 등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5대에 이르러서는 예술 세계가 더욱 다양해진다. 소치의 고손자들인 허진과 허재, 허준 등은 시대의 흐름에 각자의 개성을 더해 선조들과는 다른 독특한 작품들을 보여준다. 저마다 다른 철학과 내면세계를 담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근원을 따라가면 결국 소치로 귀결된다. 그래서인지 미술관을 나설 때면 마치 200년에 걸친 시간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된다.

▶미술관 옆 맛집
한들가든

미술관이 지척이라 그런지 묵은지 고등어조림 맛이 예술이다. 두툼하게 토막 낸 고등어와 시큼한 묵은지가 보기만 해도 군침을 돌게 한다. 양념을 골고루 끼얹어 조린 고등어는 새콤 매콤함에 달큰함까지 더해져 밥도둑을 자청한다. 직접 만든다는 반찬들도 하나 같이 맛깔스럽다.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한 끼 밥상이다. 고등어 대신 동태와 매운 쪽갈비를 선택해도 좋다. 2인 이상 주문할 수 있다. 별미로 황칠토종백숙도 추천한다.

글·사진 정은주 트래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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